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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인천으로 시집간 누나 김갑례(1914년생)가 1949년 여름 오랜만에 친정에 오자 김동식(1941년생)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누나이긴 하지만 거의 어머니뻘이라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보다 살가운 사이였다.

"그래. 동식이 잘 지냈냐?" 오랜만에 충남 아산군 인주면 해암리 나루게마을 김동식 집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식구들의 이야기는 밤새는 줄 모르게 이어졌고, 소년 김동식은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마당이 소란스러웠다. 소년이 졸린 눈을 하고 신발을 꿰차니 아버지 김선억이 "동식아, 네가 이 양반들 좀 따라갔다 와라"고 했다.

친인척이 와서 하룻밤을 자도 '신고'
 
증언자 김동식
 증언자 김동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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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간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청년단 사무실이었다. 예전엔 마을 유지가 사랑채로 쓰던 곳이었다. 소년은 대뜸 욕부터 먹어야 했다. "이놈의 새끼. 니 누나 언제 왔어!" "어제 왔는디유?" "그럼 유숙계(留宿届)를 썼어야지. 이 자식아." "그게 뭔디유?" 그렇게 되물은 소년은 꿀밤을 맞았다. 이어 사무실 책임자가 소년의 허벅지에 주판을 놓고 세게 밀었다. 맨살에 주판으로 긁히니 살이 씹혔다. 하지만 겁 먹은 소년은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야, 이놈의 자식아. 아무리 가족이라도 외지사람이 마을에 와서 하룻밤 자면 유숙계를 써야 한다는 걸 몰라!" 소년 김동식은 결혼한 누나가 집에 왔다고 신고해야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결정적으로 유숙계가 뭔지를 몰랐다. 외지 사람이 타지에서 하룻밤 이상 머무르게 되면 인적사항과 그곳에 온 이유를 의무적으로 기록하게 한 것이 유숙계다.
 
전라북도 정읍경찰서가 발행한 유숙계
 전라북도 정읍경찰서가 발행한 유숙계
 
유숙계는 이승만 정권 때인 1949년에 만들어졌다. 1948년 12월에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국민의 사상을 억압했다면, 유숙계는 국민의 일상적 삶을 옥죄었다.
 
一家(일가)□□은 물로 他人(타인)이 留宿(유숙)할때와 世帶人(세대인) 이 外泊(외박)할 境遇(경우)에는 世帶單位(세대단위)의 班長(반장)을 通(통)하여 그 □□를 申告(신고)하여야 된다
- <부산일보> 1949년 5월 18일자
 
유숙계는 1949년 5월 대도시에 한해 실시되다가 이후 농촌 지역까지 확대됐다. 이 제도는 한국전쟁 전 시골의 마을 단위까지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외지인은 리·반장에게 즉시 보고됐고, 정보는 민보단(民保團)과 지서에도 공유되었다. 1950년대 들어 유숙계는 '설렁줄' 설치로 이어졌다. 설렁줄은 5호 1통을 단위로 하는 상호 감시 시스템이었다.
 
"본도 경찰서에서는 빈발하는 강력범을 방지하며 또한 사건 발생을 속히 인근 주민들에게 알리게 하여 단시간 내에 범인을 체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방범 설렁줄 설치를 계획하여 일반도민에게 보급시키게 되었다는데 동 설렁줄은 5호 1통을 단위로 하여 새끼나 끄나풀을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연결시켜 놓고 유사시에는 이 설렁줄을 흔들어서 이웃집에서 연락을 하도록 ~"(충북신보 1954.10.28.)
 
죽은 사람 묻어준 게 죄

1950년 10월의 어느날. 충남 아산군 인주면 해암리 한절골. 치안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홍오봉(당시 61세)도 마을 둥구나무 아래로 갔다. "이 나무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있다는데... 본 사람 있소?" "제가 묻어주었습니다." 치안대원이 묻고 홍오봉이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홍오봉이도 사람 죽였다!"라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후 홍오봉은 해암리 방앗간에 구금됐다. 홍오봉은 북한군 점령 시절 완장 찬 이가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 후 목숨을 끊자 그를 묻어주었다. 

그날 오후에는 홍오봉의 아내 이순영과 아들 홍효선(1942년생)도 새끼줄에 묶여 방앗간으로 끌려왔다. 여덟 살 홍효선을 보고는 책임자가 "저 꼬마는 왜 데리고 왔냐! 당장 풀어줘"라고 호통을 쳤다. 그날 저녁 그의 어머니도 석방됐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묻어준 것이 죄가 된 홍오봉은 인주지서 창고로 옮겨졌다. 창고에는 홍오봉이 살았던 아산군 인주면 해암리 한절골 사람들이 빼곡했다. 한절골은 남양홍씨 집성촌으로 25가구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만 홍사용, 홍영선, 홍규선을 포함 22명이 구금됐는데, 20대 이상 남성은 대부분 연행됐다.

그리고 홍오봉을 비롯한 이들은 며칠 후인 1950년 10월 13일 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원들에 의해 학살됐다. 인주면에서 인민위원장을 했던 홍사철은 아들 셋과 함께 학살당했다.

홍오봉 집안의 비극은 계속됐다. 홍오봉의 아들 홍도선(당시 28세)은 인공 시절 의용군에 끌려갔지만 탈출해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신창면에서 우익단체원들에게 붙들려 저수지 근방에서 학살됐다. 의용군에서 탈출해 대한민국을 선택한 젊은이가 무참히 처형된 것이다. 그는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다. 

시집간 누나가 친정에 왔는데, 유숙계를 작성하지 않아 고초를 겪은 소년 김동식의 집도 6.25 때 난리를 겪었다. 그의 형 김인제(1922년 생), 김창식(1930년 생)이 군·경 수복 후 치안대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김인제·김창식은 인주면 도흥리 강춘식씨 집에 구금됐다.

다음날 김동식은 형님들이 먹을 밥을 들고 강춘식 집에 갔다. 집에 가니 외떨어진 창고에서 "아이구" 소리가 들려왔다. 김동식은 조심스레 보니 창고에서 웃통을 벗고 팬티만 입은 유철훈(가명)이 한절골 주민인 박창원의 아버지를 물고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창고 한쪽 옆에는 이미 고문을 당한 또 다른 사람이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다.

며칠 후 소년의 형 김인제와 김창식을 포함한 마을 주민들은 지서 뒷산 교통호에서 학살당했다. 가족들은 다음 날에야 야음을 틈타 시신을 수습하고 인주면 냉정리 공동묘지에 매장할 수 있었다. 소위 '빨갱이'의 주검은 선산에 묻을 수도 없던, 야만의 시대였다. 덧붙이자면 이후 김씨 형제가 묻힌 장소에 큰 묘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묘지가 없어져 버리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산군은 무법천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이 불법학살된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사진(2018년)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이 불법학살된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사진(2018년)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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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밀고 내려왔다가 국군에 밀려 물러난 후인 1950년 9월 26일. 천안과 경계에 있는 아산군 탕정면을 시작으로 우익 무장조직의 부역자 체포가 시작됐다. 9월 27일에는 서쪽 예산 방향 도고면에서도 시작됐으며 9월 29일 온양경찰이 복귀하면서 본격화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아산의 부역혐의자 체포와 처형은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진행돼 한국전쟁 전후 아산시 민간인 희생자는 2800명내지 3000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수복 직후 부역혐의자 처형에는 경찰의 지휘명령 체계가 아닌, 당시 '치안대', '자치대'라는 이름을 내건 아산의 우익단체 5~6개가 개입됐다.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간의 사적인 감정도 작용했다. 배방면에서는 청년방위대가, 선장면에서는 태극동맹이, 탕정면에서는 대한청년단이 주도했다. 그 중 염치면 대동리의 홍순탁(가명)은 카멜레온 같이 움직였다. 홍순탁은 한국전쟁 전 헌병으로 근무하다 탈영한 후 인민군 점령기에는 좌익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수복 후에는 입장을 바꿔 부역혐의자를 체포하고 다녔다.

1951년에도 아산군에서는 부역혐의자 불법학살이 일어났다. 1.4 후퇴 시기 배방면과 신창면의 불법연행 및 학살로 관련자가 재판을 받았다. 
 
금년 1월 초 중공군이 평양시에 진입태세를 취하자 아산군의 일부 적색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야기시킬 기색이 농후함으로 배방지서 순경 한〇〇은 향토방위대장 한〇〇과 공모해 (1951년) 1월 6일 오후 8시 좌익분자 및 동가족 183명을 창고에 예비검속하여 두고 전원총살 후 부근 금광굴혈에 사체를 유기하였음.

신창지서주임 경사 유〇〇은 좌익분자 11명을 예비검속 중, 1월 9일 오후 4시 창고에서 총살 후 사체를 유기하였음
- 조진만 법무장관이 장면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좌익분자 및 동가족 살해사건 발생에 관한 건」

평생을 따라다닌 '신원조회'
 
증언자 홍효선
 증언자 홍효선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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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홍오봉과 손자 홍도선이 전쟁통에 죽자 홍효선의 할머니 강태정은 홧병에 걸려 수복 후 사망했다. 홍효선의 모친 이순영은 감을 팔아서 아들의 교육비를 댔고 다행히 홍효선은 1967년 한양공대를 나와 수산청에 입사했다. 수산청은 이후 해양수산부로 개편됐고, 그는 2003년에 퇴직했다.

그는 36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을 졸여야 했다. 아버지와 형의 억울한 죽음이 드러나서 자기의 목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연좌제와 신원조회는 민주화 된 이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두려움이었다. 그러다 보니 직장 일에 신명을 바치는 것이 힘들었다. 팔십이 된 홍효선이 자기 삶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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