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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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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평민당)은 1987년 11월 12일 서울에서 창당되어 1991년 4월 15일 (통합으로)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이 바뀔 때까지 3년 반 정도 활동했던 제6공화국 시대의 야당이다.

평민당은 우리 정치사에 여러 가지 유의미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 1970년대 이후 정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대중이 처음으로 설계한 정당이다. 그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에 지명된 이래 야당의 비주류 처지에서 박정희ㆍ전두환 군사독재로부터 납치ㆍ사형선고ㆍ투옥ㆍ망명 등 고초를 겪다가 6월항쟁 후 정치지형의 변화가 불러온 6ㆍ29선언과 함께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평민당을 창당하였다. 

둘째, 유신체제에서 제도권 야당이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종교계ㆍ학계ㆍ문인 등 재야인사들이 반유신ㆍ민주회복투쟁의 전위역할을 하였다. 평민당 창당은 재야 인사들이 제도권 정당으로 수혈되는 계기가 되었고, 정당정치의 인물폭이 그만큼 확대되었다. 

셋째, 기존의 정당들과는 달리 노동자ㆍ농어민ㆍ도시서민ㆍ중산층을 대변하고, 정책정당을 내세우며 부단한 정책개발을 통해 정부(여당)와 경쟁하고 집권에 대비하였다. 이념과 정책을 함께 아우르는 정당이다. 

넷째, 죽산 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 평화통일론을 제기했다가 사법살인 당한 후 최초로 평화공존ㆍ평화교류ㆍ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강령으로 제시하였다.

다섯째, 선명야당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외교ㆍ안보 등 국익과 관련된 사안에는 정부와 협력하였다. 남북유엔 동시가입론을 제기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여 유엔총회에  참석할 때 평민당이 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섯째,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관철하고 단식투쟁(총재)으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쟁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확보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일곱째, 족벌신문 <조선일보>의 왜곡보도에 맞서 기사의 허구성을 밝히고, 전국 지구당을 통해 불매운동을 전개하면서 당내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언론개혁에 앞장섰다. 

여덟째, 수구언론의 편파보도에 맞서고 자체 홍보를 위해 <주간 평민신문>과 월간 <민주광장>을 발행하였다. 정당에서 주간신문과 월간잡지를 발행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아홉째, 정통야당의 한 맥을 유지해오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노태우ㆍ김종필의 쿠데타 세력과 합류하면서 평민당이 정통야당의 맥을 승계하게 되었다. 

열 번째, 김대중과 평민당에 대해 족벌언론과 수구지식인들은 '전라도당', '지역당', '지역감정조장' 등 부정적으로 매도하였다. 반면에 창당이 가져온 긍정적인 분석도 있었다.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당한 인격적ㆍ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억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합해져 나타난 사건이 광주항쟁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광주항쟁을 잊지 않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갔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김대중이란 존재는 전라도 사람들의 쓰라린 정치적 상처를 그래도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했다. 만약 김대중이란 비폭력 평화적 통로마저 없었다면 "에라 될대로 되라"는 전라도 사람들의 낙심과 반항을 막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주석 1)

이외에 평민당이 쟁취했거나 다른 야당과 연대하여 실현한 비중 있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3당야합 전제인 내각제개헌을 분쇄하였다. 
■ 공안살인내각 노재봉 총리를 퇴진시켰다.
■ 헌법재판소설치ㆍ사법부독립ㆍ8시간노동제를 관철했다.
■ 가족법,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등 여권신장에 기여했다.
■ 농어가부채경감, 농수축협장 직선제 등을 이루었다. 
■ 2백만 호 임대주택 등 소외계층 권익신장에 앞장섰다.
■ 국가원로자문회의를 폐지하고 전두환을 유배시켰다.
■ 광주특위활동을 통해 진상규명, 정호용을 정계에서 축출시켰다.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는 명분과 정책을 내걸고 창당에 나선 평화민주당 당명의 명명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취재기자는 김총재와 절친한 박 모 변호사였다고 소개한다.

당명인 '평화민주당' 그리고 그 약칭인 '평민당'에 대해 김총재는 강렬한 애착을 가졌다. 가령 양순직 부총재(대통령선거 실패 후 평민당을 탈당하고 김총재와 소원한 관계가 됐지만 그 당시에는 김총재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같은 이는 약칭인 '평민당'이 계급정당 비슷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가 김총재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다. 이 명칭의 창안자는 김총재와 절친한 박모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주석 2)

이에 대해 이희호(김총재의 부인)는 재야인사들이 안병무 박사 댁에 모여 신당 창당을 결정하면서 당명을 평화민주당으로 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10월 28일 김영삼은 13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이틀 뒤인 10월 30일 김대중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 무렵 남편을 지지하는 재야인사들이 수유리 안병무 박사 댁에 모였어요. 거기서 남편과 함께 신당 창당을 결정했지요. 또 당명을 놓고 오래 논의한 끝에 평화민주당으로 하기로 했어요."

김대중과 지지자들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11월 12일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총재로 취임함과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김대중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완전한 군정종식, 민중생존권 보장, 남북의 평화통일,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주석 3) 


주석
1> 전인권, 「김대중이 살아온 길」, 『신동아』, 1998년 1월호. 
2> 이낙연, 『80년대 정치현장』, 60쪽, 동아일보사, 1989.
3> 고명섭, 『이희호 평전』, 504쪽, 한겨레출판, 201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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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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