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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 봉오동 전투의 주역 중 한 명인 홍범도의 유해를 실은 특별수송기가 멀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날아왔다.

그는 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봉오동전투에 대한북로독군부 제2연대장으로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또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쳤다. 홍범도 장군의 귀환은 봉오동전투 101년 만이었고, 별세(1868년-1943년)한 지 78년 만이었다.
 
봉오동 전투 승리 101년만에 고국으로 귀환한 홍범도 장군의 안장식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고인의 무덤에 흙을 뿌려주고 있다.
 봉오동 전투 승리 101년만에 고국으로 귀환한 홍범도 장군의 안장식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고인의 무덤에 흙을 뿌려주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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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강원도 회양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으로 활약하며 포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나섰다. 1907년에는 포수들을 중심으로 화전 농민,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규합해 의병부대를 다시 결성해 일본군을 비롯해 순사,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 등을 응징하고 처단했다. 1910년에는 연해주로 망명해 전격적인 항일전을 재개하고 '권업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에는 간도로 이동, 봉오동전투의 주역 중 하나인 대한독립군을 지휘했다. 홍 장군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 최진동이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군에 참여해 대규모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했다. 또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참여해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다시 한 번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연해주 등지에서 집단농장과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한인 동포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이 진행되자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1943년 75세 일기로 운명했다. 
 
계룡대에 위치한 모 부대 군인들이 홍범도 장군의 묘에 참배하고 있다.
 계룡대에 위치한 모 부대 군인들이 홍범도 장군의 묘에 참배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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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특히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애국지사들이 많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으며, 가려진 독립운동의 역사가 많다"고 덧붙였다. 실제 '봉오동 전투'와 관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꽤 있다.

봉오동전투 총사령관 '최진동'

그중 한 명이 최진동(?-1945)이다. 홍범도 장군이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제2연대장이었고 최진동은 총재 겸 총사령관이었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는 간도에서 활동한 무장독립군, 즉 6개 무장부대 통합군단이었다.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있던 '대한독립군'은 이 중 1개의 독립군부대였고 이후 대한국민회와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 창설에 참여했다. 당시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지휘 체계상 여덟 번째였다. 최진동은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했을 때 레닌으로부터 홍범도와 함께 권총을 선물 받을 만큼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중국 순경국장으로 근무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군부를 조직하고 이봉남·이원 등과 함께 대원 500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여 회령·온성·종성 일대의 일제 기관을 파괴했다. 특히 1920년 6월에는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 5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이끌었다. 그해 10월에는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봉오동 전투 이후 러시아 땅으로 이동한 최진동은 오므스크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했으며 중국으로 돌아온 뒤 군벌 간의 대립 중에 오패부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중국경찰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0년 독립군 규합을 위해 벌목공을 모집하던 그는 다음해인 1941년 일본 헌병에 끌려갔다. 최진동 소유의 땅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던 일제의 토지 기부 요구에 불응한 대가였다. 모진 고초 끝에 간신히 풀려난 그는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11월 별세하였다. 장례는 철저히 일본 헌병에 의해 치러졌고, 시신은 철관에 넣어져 농지 한가운데 묻혔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자동차를 배경으로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최진동(오른쪽), 홍범도(왼쪽)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자동차를 배경으로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반병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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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 장군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업적이 재조명된 것은 한중 국교가 회복된 1992년이며 2006년 4월 봉오동에 묻힌 유해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최진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동생 최운산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전재진 광복회충남지부대한독립운동사연구회 연구원은 "지난 6월 7일 열린 '봉오동전투 전승 101주년 기념식'에는 통합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 소개도 없고 봉오동 전투를 총지휘한 총사령관이었던 최진동의 이름도 얼굴도 없다"며 "이밖에도 이범윤, 윤자형, 김혁, 서일, 유정근, 현천묵, 최운산, 안무 등의 장군급 인사들과 이름이 그늘에 묻혀 있다"고 지적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북한의 반발도 거셌다. 북한은 홍범도의 고향이 '평양'인 점과 사회주의자인 점을 내세워 그의 고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봉오동에 묻혀있던 최진동 장군의 유해가 2006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봉오동에 묻혀있던 최진동 장군의 유해가 2006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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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회도 자신들의 자부심인 홍범도의 유해가 삶의 터전에서 옮겨지는 것에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과 교수는 지난 8월 17일 페이스북을 통해 "유해 봉환 문제를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신 게 아니지 않느냐"며 "고려인들에게는 홍 장군은 절대적 존재이자 '고려민족'의 상징인데 유해 봉환의 과정에서 고려민족 사회의 여론은 사실 무시됐다"고 지적했다.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는 일제 헌병 김창룡과 간도특설대 등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그대로 둔 채 이곳에 홍범도 장군을 안장하는 것이 옳으냐는 지적도 그치지 않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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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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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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