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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KBS 제주방송총국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자 제주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13일 오후 KBS 제주방송총국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자 제주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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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3일 제주도에서 열린 국민의힘 본경선 2차 토론회에서 홍준표 예비후보(아래 후보)가 제주 4·3사건의 날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홍 후보는 "4·3의 본질은 제주양민 학살"이라면서도 "다만 4·3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난감한 게 그 날은 김달삼 남로당 주모자들이 경찰서를 습격한 날이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제주도민의 의견을 물어 4.3의 정확한 본질을 찾아, 양민학살이 이뤄진 7월쯤 시기를 기해 날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 후보의 이러한 발언은 지난 2018년 4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제주 4·3추념식에 참석합니다. 건국 과정에서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좌익 폭동에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입니다"라고 게시한 인식과 일맥상통하다. 4·3사건의 시발점을 김달삼 등의 좌익 무장봉기로 규정하면서 제주도민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그들로부터 찾는 것이 바로 홍 후보의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4·3사건이 일어난 까닭은 김달삼의 무장봉기도 아니고, 제주도민들의 죽음에 대한 주 원인 역시 그들이 아니다. 먼저 지난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4·3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보고서에 써져 있는 대로 4·3사건은 김달삼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기 이전 시기를 포함하여 지칭하고 있는 사건이다.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미군 보고서마저도 "양민 학살 80%가 토벌군에 의해서"

1947년 3월 1일 가두시위 중 기마경찰에 의해 다친 아이를 경찰이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이때 무장경찰이 총격을 가해 민간인 6명이 사망, 이중에는 15세 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여성도 있었다.
이에 전 제주도민들의 민심이 들끓어 3월 10일에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기관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하지만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이며 해당 파업을 북한과의 연결시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 혐의로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다. 검속된 자들 가운데 5월말까지 328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52명이 실형을 언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 이후 1948년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로 이루어진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이 내려와 1947년 하반기부터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도민들을 상대로 강탈을 자행했고 관청 역시 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도민들에게서 서북청년단을 먹일 미곡을 공출해갔다.

미군정이 1946년 1월 군정청 법령 45호 '미곡수집령'을 공포해 일제의 쌀 공출제도를 부활시킨데다 1946년과 1947년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거기에 웬 서북청년단이니 뭐니하는 사람들 식량도 내놓으라고 하니 도민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7월 말 한림면 명월리에서 하곡 수집에 동원된 우익청년 단체원들과 마을 농민들이 충돌한 사건이나 8월 8일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마을청년들이 보리 수매 독려 차 방문한 관리 3명을 집단 폭행한 사건이 일어난 이유다.

이렇듯 4월 3일 무장봉기 이전에도 미군정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한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깊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김달삼 등 좌익 측의 무장봉기에 초점을 내세워서는 4·3 사건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또한 양민학살의 측면에서도 좌익 무장대보다는 우익 토벌대에 의한 피해가 훨씬 컸다. 하물며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서마저도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겠는가.

유승민도 이념적 순수성에 집착...  윤석열·원희룡은 그나마 올바른 인식 가져

유승민 후보도 해당 토론회에서 4·3 사건에 대해 "정명(定名), 바른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무장대가 경찰서를 습격한 부분을 빼고, 양민이 희생당한 것을 치유하는 쪽으로 정명을 하겠다"던데 이러한 인식 역시 4·3 사건에서의 국가 폭력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얘기하지 않은 채 이념적 순수성에 집착하는 인식이다.

적어도 4·3 사건에 대해서는 윤석열 후보의 인식이 올바르게 보였다. 윤 후보는 "4·3은 그날 하루가 아니고,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초까지의 전체 과정이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벌어진 것"이라며 "자유민주주의에서 어떠한 이유든지 간에 양민 학살이라고 하는 반인권적 행위를 정부가 저질렀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 명확하게 진상을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 어렵다"고 발언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보수우파의 대통령 후보로서 지극히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제주지사를 지낸 원희룡 후보 역시 국민의 힘 내부의 4·3 사건에 대한 이념 공세를 비판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이념적 순수성이 아닌 크고 넓게 4·3 사건을 바라보는 대통령을 원한다

역사는 순수하지 않다. 학살된 양민들 중 좌익 무장대에 동조한 이들도 있을 테다. 그런데 좌익 무장대에 동조했다 하더라도 4·3 사건처럼 무차별한 학살이 용납되는가. 문명국가라면 법에 따른 처벌을 받으면 될 일이다. 홍 후보나 유 후보처럼 이념적 순수성에 매몰되어서는 좌익을 향한 국가폭력은 정당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선 경선에 나온 사람이라면 4·3 사건을 좀 더 크고 넓게 바라봐야 한다. 국가가 자신과는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 것인지, 즉 사회 내의 다양성을 국가가 어떻게 포용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로서 4·3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4·3 사건은 이미 지나간, 아픈 역사가 아니라 더 나아가 지금 현재 우리 사회가 닥친 문제와도 직결된 사건이다. 나는 그러한 관점을 지닌 대통령을 원한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홍 후보와 유 후보는 탈락인 셈이다.

태그:#홍준표, #유승민, #4·3 사건, #원희룡,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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