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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백만 번 산 고양이>, 에세이 <사는 게 어때서>, <죽는 게 어때서> 등 사노 요꼬 작가의 글에는 우리 삶에 대한 '촌철살인'이 담겨져 있습니다. 천개의 바람이 출간한 <하늘을 나는 사자>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 수업에 좋은 책으로 <하늘을 나는 사자>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물론이고 그림책을 함께 본 선생님들이 수업은 둘째치고 저마다 그림책 속 '사자'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 공감했습니다. 사자가 어땠길래 우리들은 '감정 이입'을 했을까요?
 
하늘을 나는 사자
 하늘을 나는 사자
ⓒ 천개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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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무에 시달리는 사자 

사자와 고양이들은 한 동네에 살았어요. 고양이들은 '멋진 갈기와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사자'를 보려고 모여들었어요. 

사자는 자기를 보려고 온 고양이들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에구, 오지랖~'이라며 벌써 혀를 차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인간 관계 모든 갈등의 시작은 이처럼 '등가'가 아닌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저 놀러온 고양이들에게 사자의 마음이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어흥!' 우렁차게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사냥을 나간 사자는 먹잇감을 잡아와 요리까지 해서 고양이들을 대접했습니다. '이야~ 역시 사자야' 하고 맛있게 먹은 고양이들은 날마다 사자네 집에 왔습니다. 
 
하늘을 나는 사자
 하늘을 나는 사자
ⓒ 천 개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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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나는 낮잠을 자는 게 취미야."

실제 동물의 세계에서도 사자는 하루에 20시간을 넘게 자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대접을 하다보니... 사자는 쓰러질 듯 잠이 들고, '힘들다'며 우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쓰러지듯 잠든 사자를 보고도 '낮잠 자는 줄 알았잖아'라며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고양이는 사자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자는 고양이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썼습니다. 낮잠을 자는 대신 하늘을 날았습니다. 황금색으로 빛나던 사자는 점점 푸르죽죽해집니다. 

어떤가요? 우리 모두 살아오며 '사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피곤에 쩔어가면서도 날마다 고양이들을 대접하는 사자에게 공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새로 일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가사노동을 해야 했던 자신이 마치 날마다 고양이를 대접해야 하는 사자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몸이 아파도 쉬이 하던 일을 놓을 수 없던 분은 쓰러지듯 잠든 사자가 애쓰지 말고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어흐흐응' 하며 날아오르려다 그만 쓰러져버린 사자는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돌이 되어 잠이 들자 사자는 비로소 본연의 황금빛을 되찾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사자
 하늘을 나는 사자
ⓒ 천개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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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해법은 '나'
 
'으음 ......... 분명 피곤했을 거예요.'

몇 십, 몇 백 년이 지난 어느 날 어느 날 아기 고양이의 이 말을 듣고서야 사자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사자가 기다린 건 '공감' 어린 한 마디였네요. 

피곤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배려하느라 애쓰는 사자와 참 무심한 고양이들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라고 심리학은 정의 내립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우리는 힘이 들죠. 그 힘듦의 '근원'은 바로 사자와 고양이처럼 '내 맘 같지 않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나는 사자>는 참 의미심장합니다. 왜 사자와 고양이가 한 마을에 살았을까요? 물론 사자와 고양이는 같은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이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살아가다니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같은 '과'라 여기지만 사실은 다른 '종족'들이 모여사는 곳일지도요.  

고양이들이 사자네 집으로 놀러갑니다. 고양이들 입장에서는 황금빛 갈기를 가진 사자가 궁금했겠지요. 사자가 고양이들을 대접하기 위해 하늘을 날았을 때 고양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휴~' 했습니다.

'와!'가 아니라, 왜 '휴~'였을까요? 어쩌면 고양이들은 사자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맹수 사자가 자신들을 잡아먹을까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자신들을 해꼬지하기는 커녕 대접을 한다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당연합니다.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라는 속담도 있듯이 고양이들이 사자를 이해하는 게 쉬웠을까요? 우리가 '연예인'이나, '정치인' 우리와 다른 '부류', 그 반대로 '내 부모', '내 자식'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것처럼 사자에 대한 '잣대'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 것도 없이 '공감'과 '이해'가 관계를 풀어가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지만, 그만큼 '공감'과 '이해'가 쉽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피곤했을 거예요'라는 '공감' 어린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수백년이 걸린 것처럼 말이죠. 그림책 속 고양이들이 더욱 야속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살아가며 '타인'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사자는 자신이 고양이들이 경외해 마지않는 존재라는 걸 알았을까요? 자신이 굳이 고양이들에게 얼룩말을 잡아 대접할 필요가 없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갈기를 가진 '사자'임을 깨닫지 못했던 건 아닐까요? 내가 사자인 줄도 모르고 고양이들과 어울려 살려고 애를 쓰는 경우도 꽤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얼룩말'을 대접하는 게 아니라, 내가 '황금빛'을 가진 사자임을 깨닫는 게 먼저일지도 모릅니다. 

사자와 고양이의 '관계'는 '감정형' 인간과 '사고형' 인간의 부조화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발달한 사람과 보이는 상황의 득실을 따지는 사고형 인간의 다른 반응일 수도 있겠지요(홋타 슈고 저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 이처럼 엇물리는 사자와 고양이들에 대한 해석은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우리라는 '인간'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기에 참 다르다는 겁니다. 즉 내 맘같지 않다는 거죠. 그 다른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데 그들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다 보면 지쳐버릴 수도 있고, '공감' 어린 한 마디를 기대하다 보면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릴 수도 있다는 게 사노 요꼬 식의 촌철살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타인'에게 방점을 찍으면 내가 힘들어집니다. 수백 년이 지나 깨어난 사자가 '얼룩말도 잡을 수 있어?'라는 말에 '어흥!', 우렁차게 외치며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여전하지요. '대접'을 하고픈 '사자의 성정'이 쉽게 변하나요.

그래도 이젠 스스로 자신의 낮잠을 챙기는 사자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굳이 얼룩말을 잡아주지 않아도 이미 황금빛 갈기가 빛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고양이들이 보러 오는 멋진 '사자'라는 데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길 바랍니다. 타인과 관계를 통해 행복을 찾는 것도 다 '나'를 위해서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게재됩니다.


하늘을 나는 사자

사노 요코 (지은이), 황진희 (옮긴이), 천개의바람(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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