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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죄를 조사하고 판정·집행하며, 그 결과로 형벌을 가하는 건축물은 매우 즉자적이고 위압적인 얼굴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검·경찰청과 법원은 물론 교도소, 구치소 등 교정시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시설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거나 때에 따라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막연한 '공포심'이 즉자적으로 투영되는 건축물이다.
 
1987년 제반 기능을 의왕에 신설된 '서울구치소'로 넘겨주고, 역사관으로 재 단장한 서대문형무소.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987년 제반 기능을 의왕에 신설된 "서울구치소"로 넘겨주고, 역사관으로 재 단장한 서대문형무소.
ⓒ 서대문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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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死刑)을 제외한 전근대 형벌이 태형, 유배형 등 주로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다면, 근대 형벌은 '자유형'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감금이라는 신체 구속을 통해 감시체계 안에 가두어 일정 기간 혹은 영영 사회로부터 격리를 의미한다. 감옥에서 노역을 부담하는 '징역'이라는 집행체제다. 전근대가 미결수 위주 임시감금 체계였다면, 사법제도를 수반한 근대 형벌은 기결수를 분리·구속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사회 재적응을 목표로 투옥을 결정하는 행위는 '지배자가 행사하는 권력의 경제학'이라 일갈한다. 이는 사법 집행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휴머니즘에 따라 판정을 내리는 게 결코 아니란 의미다. 즉 권력을 효율적으로 유지·운영하는 도구로 마련된 제도가 곧 자유형이다.

우리 경찰기구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생겨난다. 일제의 배후 조종과 개입은 물론 실질이 아닌 형식에 그친 개혁이라는 농후한 한계에도, 법적 근거는 이때 마련된 셈이다. 군국기무처 산하 내무아문 예하에 경찰기구 '경무청'을 신설하여 일반인의 제반 활동을 규제하고, 그들의 반정부활동을 탄압·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는 많은 부분 동학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때 형조 산하 전옥서(典獄署)는 물론 각 기구에 분산·산재한 부설 감옥이 모두 신설된 경무청 산하 감옥서(監獄署)로 일원화된다. 운영 세칙도 일본 것을 그대로 베껴 마련했음에도, 그 실질 운영에 있어서는 옛 체제를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1900년 6월 경무청이 내무아문에서 경부(警部)로 이관되면서, 감옥서도 같이 따라간다.

일제 손아귀에

1904년 러·일전쟁 때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한반도에 일제 식민 통치체제가 구축된다. 감옥은 통감부를 통해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일제 식민 통치체제를 유지 시키는 장치로 변모한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군대해산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일제는 감옥관제(官制)를 제정하여 급증하는 수감 인원을 수용·관리하기 위한 제도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후속 조치로 '경성감옥서'를 설치, 일본인에 의한 감옥 운영의 기초를 마련한다.
 
우리 옛 감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주감옥.
▲ 공주감옥(1921년) 우리 옛 감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주감옥.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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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감옥서는 일제 손아귀에서 식민화에 저항하는 세력을 처벌·제거하는 첨단기구로 변모해 간다. 1907년 12월을 전후하여 경성에 설치된 근대식 감옥(본감옥本監獄) 체제가 전국으로 확산하기에 이른다. 권역으로 나뉜 각 지방의 사법권마저 장악하려는 의도다.

1908년 이를 다시 법부(法部)로 이관, 검사장이 감옥서 장을 직접 지휘·감독하는 체제를 마련해 일본인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조치한다. 이때 경성감옥서가 '경성감옥'으로 바뀐다. 이는 일본인에 의한 본격적인 감옥 운영을 의미하며, 법부의 한 부서가 아닌 감시와 처벌을 주도하는 집행기관으로 감옥이 운영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일본인이 전면에 나선다.

감옥은 식민화 과정의 가장 첨예하고 즉자적인 폭력을 상징하는 수단이다. 조선인 처벌 영역 확대·강화와 식민권력 절대화를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으며, 일제에 저항하여 무장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을 감금·처벌하는 장치로써 효율적인 통치를 수행하는 기재로 작동한다. 이는 나아가 사상 통제는 물론 항일과 독립 의지 제거를 통한 무기력화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경성감옥 신축
  
1907년 설계된 것으로 추정하는 부지평면도. 초창기 서대문형무소는 이 설계에 따라 지어짐.
▲ 독립문 외 경무청감옥서 부지평면도 1907년 설계된 것으로 추정하는 부지평면도. 초창기 서대문형무소는 이 설계에 따라 지어짐.
ⓒ 이영천(역사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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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 감옥의 설치는 1906년 기획된다. 일본인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감옥 수용 능력 부족을 지적한다. 이는 곧장 감옥 설계로 이어진다. 1907년 초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문 외 경무청감옥서 부지평면도'가 이를 증명한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 모습.
▲ 초창기 모습 1908년 서대문형무소 모습.
ⓒ 이영천(역사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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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곧바로 5만 원 비용으로 감옥 신축에 들어간다. 설계자는 일본인 시우텐 가즈마(四王天數馬), 공식 명칭은 '경성감옥'이다. 1907년 8월 27일 순종 즉위식 전후에 완공되나, 의병봉기와 황권 교체 등 급변하는 정세로 인해 개소하지 못하다가 1년여 후인 1908년 중반에야 사용이 시작된다.
 
1907년 지어질 당시의 담장. 나무판자에 아연판을 붙어 만들었음.
▲ 아연나무판 담장 1907년 지어질 당시의 담장. 나무판자에 아연판을 붙어 만들었음.
ⓒ 이영천(역사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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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경성감옥은 목재를 사용해 지었다. 담장 일부만 벽돌이고, 나머지는 아연판을 덧댄 나무판자였다. 따라서 무척 열악한 시설이었고, 파옥(破獄)을 도모하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T자 평면의 옥사(부속시설 포함 1587㎡)와 청사(부속시설 포함 265㎡), 부지면적 13000㎡다. 수용인원 500명으로 공장·목욕장·기타 시설로 구성되었다.

T자 평면 옥사는 한 자리에서 감시는 물론 순찰, 환기, 방한 등에 유리한 구조였다. 이는 1908년 당시 전국에 산재한 8개 옛 감옥 수용면적 985㎡의 1.6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1908년 10월 경성감옥의 제반 기능을 통째로 이곳으로 이전시킨다. 이는 80년 서대문 감옥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치였다.

감옥 입지는 서울 서쪽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었음은 물론 독립문·독립관과 인접해 있으면서 인왕산, 안산 등이 이루는 분지다. 이곳에 세워진 통제와 감시기능은 일제 지배 도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주구(走狗)로 맹렬하게 성장해 나간다.
 
감옥의 높은 담장과 감시탑은 보통 사람들 무의식에 '공포심'을 심어주는 도구로도 작용함.
▲ 형무소 담장과 정문, 감시탑 감옥의 높은 담장과 감시탑은 보통 사람들 무의식에 "공포심"을 심어주는 도구로도 작용함.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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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들어진 감옥 담 안쪽은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별도 공간이다. 그 안에서 형성된 '공포심'은 높게 분리된 담 밖을 통제하는 기능을 겸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자신도 담 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낸다. 이는 고문과 폭력, 감금과 죽음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일제에 대한 두려움과 위축, 복종으로 변해 가는 무형의 효과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지워내고,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된다. 마침내 경성감옥이 '일제 권력의 경제성과 절대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파놉티콘 구상

이곳 수감자는 1908년 835명, 1909년 1968명으로 시작부터 정원을 초과한다. 이는 1907년 이후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방증한다. 수감자들 대부분이 의병과 의병장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주도한 이인영(李麟榮)을 비롯하여 허위(許蔿), 이강년(李康秊) 등으로 이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당한다. 1908∼1911년 사이 서대문에 수감 된 115명 의병 중 58명이 사형당했다.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수행한 일제는, 의병과 장차 자라날 항일독립군의 씨를 말릴 기세로 득세를 부린다. 이는 식민지 지배로 향해가는 마지막 길을 닦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때 전국적으로 수감자가 급증한다. 또한 강제 병합 때 이곳 수감자는 2053명으로 수용인원의 4.2배에 이르렀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수형생활 내용
▲ 비참한 수형생활 백범일지에 기록된 수형생활 내용
ⓒ 이영천(역사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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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엔 조선 총독 테라우치 암살을 모의했다고 조작한 '신민회 사건'으로 600여 명이 체포된다. 이들이 경성지방법원에 배정되어, 수감 인원은 5.1배에 이를 지경이었다. 옥에 갇힌 독립군의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이때 투옥된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통해 자세히 전하기도 한다.
 
마포에 세워진 경성형무소. 서대문형무소의 이름과 기능 일부가 이곳으로 이전됨.
▲ 마포 경성형무소 마포에 세워진 경성형무소. 서대문형무소의 이름과 기능 일부가 이곳으로 이전됨.
ⓒ 이영천(역사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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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마포 공덕동(현 서부지방법원·검찰청)에 1912년 새로운 감옥을 개설하고, 이를 '경성감옥'으로 칭한다. 따라서 현저동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이름을 바꾼다. 감옥을 나눴어도 수감 인원은 크게 줄지 않는다.

이에 일제는 은사(恩赦)라는 명분으로 사면과 감형을 시행하나 수감자는 여전히 증가 추세다. 그만큼 일제 탄압이 악랄했고, 반대로 조선의 항일투쟁이 치열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무판에 아연을 덧댄 감옥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역사관에 남은 옥사 모습. 3개 동 옥사 꼭짓점에 간수소를 두어, 이곳에서 소수 감시자가 3개 동을 편리하게 감시하는 전형적인 파놉티콘 구조.
▲ 파놉티콘 구조 역사관에 남은 옥사 모습. 3개 동 옥사 꼭짓점에 간수소를 두어, 이곳에서 소수 감시자가 3개 동을 편리하게 감시하는 전형적인 파놉티콘 구조.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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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일제는 새로운 형태의 감옥을 구상하게 된다.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 공리주의자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으로, 효율적인 죄수 감시가 가능한 구조)이다. 파놉티콘은 단지 감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파놉티콘의 포괄적 감시체계는 점차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 악랄한 식민지 지배체제와 그 궤를 같이하며 촘촘한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 다음 회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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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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