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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고구마 하루에 두 개만 먹으래."

피검사 결과,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당뇨가 경계선에 있단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닌데 왜? 지난번에도 당뇨가 경계선에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별일 아닌 듯 잊더니 이번엔 좀 다른가 보다. 경계선도 차이가 있겠지. 의사는 남편의 식생활을 물었고 그중 고구마를 지목했단다.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먹을 때 가장 행복한 남자인데 어쩌나.'

우리의 아침 준비는 남편의 손길로 시작된다. 에어프라이어 두 대와 녹즙기가 주방보조 1, 2위를 다툰다. 일어나자마자 고구마, 양파와 마늘을 넣고 타이머를 돌려놓으면 일단락되었다.

다음 차례는 녹즙기다. 사놓고 대부분 안 쓰는 기기임을 알면서도 모험 삼아 구입했다. 농장에서 키운 케일 몇 장과 깍둑썰기한 사과와 당근을 넣어주면 마시기 좋은 두 잔의 주스가 나온다. 칼질이 서툰 남편도 여기까지는 할 만 하단다. 문제는 세척이다.

한동안 열과 성을 다하던 남편 입에서 예상했던 불만이 들린다. 아무리 간편해졌다고 해도 부속품들에 끼어있는 이물질들을 제거하는 일은 여전히 번거로운 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이사이 솔질에 힘을 주지만 물때는 고스란히 남아 세월을 말한다. '이걸 계속 마셔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먹는 즐거움보다 뒤처리의 부담이 크다 보니 녹즙기의 주방보조 수명은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남편이 아침 먹거리를 위해 주방에 발을 들인 건 4년 전부터다. 수술하고 회복기에 있는 아내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자세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남편 말고는 대안이 없었지만 과연 의욕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을지 의문이었다. 양념 하나 어디 있는지 일일이 알려주며 어느 세월에 밥을 먹겠는가. 갈 길이 멀었다.

게다가 주먹구구식 내 요리 스타일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 없는 남편은 정확한 수량과 시간 등을 물었다. 된장 한 스푼도 뜨기 나름이고 시간을 기억하는 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중간중간 맛보고 식재료와 양념 등을 추가하는 고무줄 레시피는 초보자에게 혼란만 주었다. 일단 조리는 포기하고 쉽고 간단한 것을 찾았다.

고구마 삶기는 물과 불 조절 실패로 끝이 나는 듯했다. 물컹거리거나 태우기를 반복할 즈음 에어프라이어가 해성처럼 등장했다. 남편은 두세 번의 시도로 완벽한 레시피를 만들었다. '180도에 40분. 큰 것은 도중에 한 번 뒤집어 준다.' 매일 아침 수준급의 군고구마를 내놓았다. 남편의 성취감은 최고봉에 달했고 고구마의 숫자도 늘어갔다.

어느 날, 타이머 고장으로 고구마가 숯이 되고 말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먹었으니 수명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딸이 곧바로 전자식을 보내왔다. 손때 묻은 예전 것은 잠시 곁에 두기로 했다. 곧이어 양파와 마늘이 추가되는 일이 발생했다.

크고 좋은 농작물은 주기도 편한데 탁구공만 한 양파와 새끼손톱 같은 마늘이 골칫거리였다. 상당히 많은 양이어서, 천덕꾸러기처럼 굴러다니다 버리겠다며 안타까워했다.

한 번 구워 먹어볼까? 그날부터 양파 마늘은 고구마와 함께 세트 메뉴로 식탁에 올라왔다. 흙을 씻어내기만 하면 껍질을 벗기는 수고 없이 양파는 두 쪽으로, 마늘은 꼭지만 잘라 넣기만 하면 되었다. 구워진 양파와 마늘은 껍질과 거의 분리되어 있어서 까먹기 편하고 맛도 그만이었다.

세 가지를 한 번에 구워야 하는 바람에 고장 난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하게 됐다. 지켜보며 써먹을 양으로 시도했는데 우습게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얘가 새 친구 오니까 정신이 들었나 보네."

의도치 않게 에어프라이어 두 대를 장만한 셈이 되었다.

남편의 아침 준비(후식)가 끝나면 바톤터치를 한다. 백반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밥을 차리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다. 누구네는 고구마와 과일로 아침을 먹는다는데. 누구네는 빵과 샐러드로. 누구는 구운 달걀 두 개와 커피 한 잔이면 족하다는데.

식단을 바꿔보려는 속셈으로 한마디 흘려보지만 메아리는 없다. 더하기는 알아도 빼기는 못 하는 남편의 식탐은 아직 내리막길에 오지 않았다.

먹고도 남을 분량의 푸짐한 밥상 앞에서 행복한 모습을 진하게 표현하는 남자. 식탐을 지지하는 신념은 따로 있다.

"이 끼니를 거르면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매 끼니에 성실하게 답하는 그에게 '적당히'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만감이 행복이라는 고지에 오를 때까지 그의 눈빛은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야생동물처럼 반짝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밥과 씨름하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다.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잘 먹었다는 미소를 한껏 지을 때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터질 것만 같은 배를 안고 있는 그에게 산달이 언제냐고 묻는 이도 이제는 거의 없다. 이미 남편의 자부심으로 등록하고 눌러 앉은 지 오래다.

환자로 살다 보니 건강만큼 부러운 게 또 있을까. 잘 먹는 남편에게 파이팅을 외친다.

"배 나와도 좋다. 건강하게만 늙어다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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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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