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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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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사실 농사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작은 규모다. 회사 옆 공터를 억지로 텃밭이라고 이름 짓고 농사 흉내를 낸다는 게 바른 표현일 것이다. 해마다 봄이 오길 기다리는 것 역시 농사놀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남으로부터 봄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릴 것도 없이 오가며 종묘상을 눈여겨본다. 그러다 이른 봄 종묘상에 펼쳐진 모종판들을 보면 마음이 운동회 날 달리기 출발선에 선 것 마냥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땅! 드디어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면 맨 먼저 쌈 채소 몇 가지를 심으며 재미난 농사놀이가 시작한다. 채 열 평도 안 되는 돌투성이 땅이지만 욕심만큼은 대농이 부럽지 않다. 양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으니 이것저것 종류로 승부수를 둔다.

상추 한 가지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청상추, 적상추 정도로 끝낼 내가 아니다. 한창 인기 좋은 로메인 상추와 숙면을 유도하는 락투신 함량이 일반 상추의 백 배가 넘는다는 숙면상추, 아삭한 식감이 우수한 아삭이 상추에 꽃상추까지 종류별로 대여섯 포기씩 심다보면 금방 상추 장사를 해도 될 것처럼 뿌듯하다.

여기다 쑥갓이며 치커리 루꼴라는 덤이다. 쌈 채소밭의 주연이 상추라면 이들은 조연 정도 될 것이다. 특별히 올해는 한쪽에 다년생인 곰취와 당귀 다섯 포기씩을 시험 삼아 따로 심었다. 텃밭의 특별초대 게스트다. 상추 포기 사이사이 씨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를테면 신인을 대거 영입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해놓으면 모종으로 식재한 쌈 채소를 다 먹을 때 쯤 새로 자라난 신인들이 다시 제 몫을 하게 된다. 보기에 시작은 미약했으나 봄부터 여름까지 내 쌈 채소 농사는 나와 가족들은 물론 주변 지인들과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다.

쌈 채소가 한창 재밌어질 즈음 브레이크를 살짝 건다. 마냥 쌈 채소 타령만 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시기를 놓치지 말고 상추밭 사이사이 고추 모종과 토마토 모종 몇 포기씩을 심어 놓는다. 새로 심은 모종들이 어느 정도 자란다 싶으면 간섭받지 않도록 주변의 상추를 서서히 정리해야 한다. 아깝다고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제부터 쌈이 아닌 열매에 집중할 때가 된 것이다.

상추밭에서 존재감 없이 작았던 고추모종이 쑥쑥 자라기 시작한다. 토마토나무에도 어느새 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하면서 날로 날로 키가 자라기 시작한다. 씨앗용으로 남겨놓은 상추 몇 포기는 빛나던 주연의 자리에서 조연 내지는 단역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그보다 한때 잘 나가던 대 배우가 후배의 작품에 우정 출연한 카메오 정도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일지 모른다.

상추밭은 어느새 고추밭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그러나, 올해 고추 농사도 망쳤다. 흥행에 실패했다. 작년에 이어 연이은 실패다. 작년엔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처음에 풍성하게 열렸던 고추들이 전부 병들고 말았다. 초기에 풋고추 몇 개로 만족하고 고추농사의 막을 내렸다.

도시 농부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다 

올해는 낮은 기온이 문제였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법한 여름의 한 복판에도 그다지 더운 줄 몰랐다. 더울 때 덥고 추울 때 추워져야 할 것을 더위가 너무 늦게 찾아온 탓인지 고추가 별로 열리지 않았다. 작년에 입은 병충해를 만회하고자 신경 써서 고른 품종도 소용없었다.

거기다 네 그루의 방울토마토는 방울토마토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알이 작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정도면 '콩알 토마토' 내지는 '팥알 토마토'라고 해도 뭐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기대를 잔뜩 하고 품종까지 고심해서 선택했지만 연속해서 고추 농사에 재미를 보지 못하게 되자 고추밭을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연이은 고추 실패로 수년 동안 해 온 도시 농부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무너진 자존심을 상쇄시킬 회심의 한 방이 필요하다. 고민 끝에 농사 경력 처음으로 김장배추 스물 네 포기를 고추밭 사이사이에 고루 심었다. 공들여 예고편을 찍듯 김장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한 통씩 선사하고 배추 장사를 하겠노라 갖은 너스레를 떨어 놓았다.

처음으로 시도한 배추 농사에 기대가 넘사벽이다. 작은 배추모종이 날로 날로 자라기 시작한다. 매일 들여다보며 배추 농사만큼은 꼭 성공하리라 다짐을 했다. 그러나, 또다시 복병이 나타났다.

악역도 이런 악역이 없다. 배추벌레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시나리오지만 달팽이라니, 달팽이가 그렇게 기승을 부릴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잡아내고 잡아내도 끝이 없었다. 배춧잎 한 잎 한 잎을 확인해 손톱만한 것부터 팥알보다도 작은 어린 달팽이까지 나무젓가락으로 일일이 집어내는 작업은 결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매일 배추 밭으로 행했다. 오기가 발동하면 누구도 못 말린다. 구멍 숭숭 뚫린 볼품없는 배추밭이지만 이제 정말 농부가 된 것 같아 흥겨웠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가. 여름 막판 더위가 포악을 떨고 물러나자 뒤늦게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배추가 제법 자라 속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으니 별 재미도 못 주면서 그늘만 만들고 있는 고추나무는 뽑아버릴 계획이었는데 마치 그걸 알고 항의라도 하듯 가지가 찢어질 지경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험엔 든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한정된 터에 이것저것 갖은 머리를 써가며 과욕을 부린 것에 한 방 먹이려는 것일까. 명색이 고추 농사에 여름내 붉은 고추 한 근도 재미를 못 봤는데 이제 와서 무슨 약 오르는 짓이란 말인가. 지금서 열려봐야 짧은 가을볕에 붉은 고추가 될 가능성도 없으면서 나보란 듯이?

낭패다. 배추에 눈을 맞추면 배추를 살려야 하고, 고추나무를 보면 이제라도 주렁주렁 열려준 게 기특하고 고마워서 조금이라도 더 크도록 놔두고 싶고. 그렇지만 이미 둘 다를 선택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안다. 그야말로 선택과 집중의 절묘한 타이밍이 된 것이다.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배추를 선택하고 집중하기로. 제법 약이 올랐으나 익기엔 이미 늦어버린 고추를 전부 따서 비닐 팩에 조금씩 담는다. 그리고 주변 이웃들과 지인들에게 하나씩 전한다. 각 가정에 전해져 풋고추로, 양념으로 제 소임을 다할 것이다. 내 고추는 요리에 응용할 때 어차피 주연이 되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으나 그 매운 맛 만큼은 확실한, 한 방이 있는 카메오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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