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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정서를 운영하고 있는 김봉희 사장.
 카페 정서를 운영하고 있는 김봉희 사장.
ⓒ 최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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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지나가다가 힘들거나 궁금하면 편안하게 들르세요. 그러면 제가 정성껏 커피 내려 드릴게요."

인하대 후문 성바오로유치원 우측 골목(인천 미추홀구 경인남길102번길 31, 1층) 중간쯤에서 '정서'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김봉희 사장은 자신의 호흡대로 고요함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김봉희 사장이 운영하는 카페는 제일 먼저 보여야 할 간판 대신, 버려진 캔에 정성껏 그림을 그려서 만든 화분들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빈 깡통들이 놀랍도록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돼 카페 앞에서 전시되고 있다.

다채로운 색채와 다양한 그림, 그리고 김봉희 사장이 일기처럼 써넣은 손글씨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일률적으로 심어 놓은 커피나무는 다양한 색감의 화분들을 조화롭게 엮어주고 있다.

천천히, 차분히

정서라는 이름 옆에는 '천천히, 차분히'라는 글귀가 작은 제목처럼 나란히 붙어있다. 카페의 분위기와 글귀가 잘 어울린다고 하자, 김봉희 사장은 "저의 부족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글귀"라며 "그 부족함으로 인해 저는 늘 다른 이들보다 느렸고 항상 뒷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시대의 템포를 따라가지 못했던 자신의 느림이 낙오자 같았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일상에서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녀는 느리지만 천천히 가고 있었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됐다.

"사회에서는 저의 느림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됐어요. 사람들은 대부분 느린 저의 발걸음을 기다려주지 않더라고요. 일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음에도요."

그런 과정에서 그녀는 50대가 되어 알게 됐다. 자신의 부족함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느린 것이고,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것을.

가게 간판을 걸지 않은 것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정서라는 이름 옆에 나란히 걸어놓은 '천천히, 차분히'라는 낱말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깊은 위로의 말처럼 들린다.
 
카페 정서에는 빈 캔에 예쁜 그림을 그려넣은 화분들이 놓여있다. 캔 화분에는 커피나무가 심어져 있다.
 카페 정서에는 빈 캔에 예쁜 그림을 그려넣은 화분들이 놓여있다. 캔 화분에는 커피나무가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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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캔에 예쁜 그림을 그린 화분들이 놓여있는 카페 정서에는 가게 간판이 걸려있지 않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의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다.
 버려진 캔에 예쁜 그림을 그린 화분들이 놓여있는 카페 정서에는 가게 간판이 걸려있지 않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의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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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캔에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나 이유를 묻자 그녀는 "저는 늘 가난했고. 그런 상황들이 제 불편함을 스스로 해소하는 방법을 찾게 했는데 그중 하나가 버려진 것들을 나만의 방법으로 다시 재구성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며 "나에게 맞게 만들어 쓰기를 잘했고 즐겼다"라며 사소함이 최상의 것이라는 일상의 깨우침을 가난에서 얻었다고 한다.

김봉희 사장이 빈 캔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삶의 줄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유년 시절 그녀는 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그 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방법을 찾은 것이 빈 캔을 비롯해 빈 병이나 나무, 냄비뚜껑, 북, 주걱 등 다양한 폐 물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엔 캔이 아닌 도자기에, 또는 나무나 냄비 뚜껑이 아닌 화판에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도자기나 화판이 주는 정형성과 틀이 싫었고 재미가 없었다. 빈 캔을 이용해 화분으로 만들고 그곳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겁다.

"캔 입구를 깨끗하게 자르는 건 저만 할 줄 알고 처음엔 힘들었지요. 손도 많이 다치고. 그런데 하다 보니 방법이 터득됐어요. 특히 캔의 바탕에 흰색을 칠할 때 정말 기분이 좋은데 그 이유는 뭐든 그릴 수 있어서예요. 글도 맘껏 쓸 수 있어요.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캔에 표현해요."

다른 사람들이 노트에 기록할 때 그녀는 캔 위에 기록했다. 그런 상황들이 김봉희 사장에겐 재미있고 즐거운 일상생활이었다.

2010년 전후로 재활용 리사이클링, 업사이클링이 등장하면서 관련 제품들을 판매하는 곳이 늘었다. 그녀도 마포나 파주 등 프리마켓에 나가서 판매하기도 했다. 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그녀 역시 처음에는 리사이클링, 유즈플, 업사이클링 등 문구화해 표현하려고 애썼다. 명분이 필요해 목적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곧 멈췄다.

사소한 풍경들, 그림이 되다
 
날마다 비탈길에서 빨간 짐 꾸러미를 자전거에 싣고 내려오시는 경비아저씨, 늘 카페 정서 앞을 지나다니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김봉희 사장의 그림 모델이다.
 날마다 비탈길에서 빨간 짐 꾸러미를 자전거에 싣고 내려오시는 경비아저씨, 늘 카페 정서 앞을 지나다니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김봉희 사장의 그림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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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은 '지나가는 길'과 같이 중간에 흘러들어서 이어지는 말들처럼 편안한 언어나, 정서 앞 골목을 지나가는 할머니의 모습처럼 그 앞의 소소한 풍경들이다.

"날마다 경비아저씨가 저 비탈길에서 빨간 짐 꾸러미를 자전거에 싣고 내려오시거든요. 또 할머니 한 분도 항상 이 앞을 지나가시는데 지팡이 높이만큼 허리가 굽으셨어요. 그런 분들을 매일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분들을 그리게 되더라고요."

실제로 캔 화분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이 골목을 지나다니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을 비롯해 이곳 골목 풍경이 대부분이다. "진짜 많이 담고 싶은데 제 실력이 부족해서 이 정도밖에 못 하고 있다"며 김봉희 사장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갤러리 정서의 작품들은 이 골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정서 앞 골목에 겨울이 찾아오면 정서의 모든 작품은 겨울의 색채와 그림으로 진열되고, 여름이 되면 또 여름 색채와 여름을 닮은 그림들이 진열된다. 정서는 이렇게 주위와 함께 호흡하며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해 오던 이런 종류의 그림 작업을 그녀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14년. 처음으로 집을 사게 되면서부터 '하우스 갤러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김봉희 사장은 출입문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전시를 하겠다는 계획으로 입주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구해서 준비했다.

"다들 기꺼이 동의해 주셨어요. 버려진 일상 용품들은 모두 다 그림의 재료로 사용했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말 분주히 준비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준비한 작품들을 일주일 동안 전시했다. 동네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구경했고, 작품을 사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2014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집을 산 김봉희 사장은 '하우스 갤러리'라는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출입문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전시를 하겠다는 계획으로 입주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구해 실행했다. 사진은 김봉희 사장이 2014년 입주자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던 하우스 갤러리 장면
 2014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집을 산 김봉희 사장은 "하우스 갤러리"라는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출입문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전시를 하겠다는 계획으로 입주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구해 실행했다. 사진은 김봉희 사장이 2014년 입주자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던 하우스 갤러리 장면
ⓒ 김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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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희 사장은 2018년 8월, 카페 정서를 시작하면서 '멈춘 그림 다시 그리기'라는 타이틀로 캔 화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낙서하듯이 땅바닥이나 벽장에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든 그리는 행위를 멈추게 된 그 기억을 소환해서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이 시작하게 된 이유였어요."

이 공간에서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어느 순간 멈추게 된 그림을, 배워서가 아닌 각자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고 싶은 도구에 마음껏 그려보고자 했다. 사람들은 초기에 그런 그녀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접근하길 힘들어했다. 그래서 구체적인 매뉴얼로 내놓은 것이 '캔 화분 만들기'다. 지금은 관심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신청서를 받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김봉희 사장은 자신이 하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가치를 높이 평가하려는 것을 지극히 경계한다. 소리 없이 조용하게, 드러나지 않게 어느 곳에서든 머물렀다 떠나는 삶을 지향하는 그녀는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사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삶을 돌아보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

"몸이 편안해지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그녀가 머물고 있는 카페에는 특별한 꾸밈의 흔적이 없다. 그 흔한 인테리어도 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가 머물렀다 간 흔적 위에 그녀의 개인 역사를 고스란히 얹고 있었다. 김봉희 사장이 빈 깡통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녀가 머무는 공간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조화롭다. 그녀는 결코 환경운동가가 아니었다. 다만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사람들은 쉬고 있다. 혼자 와서 커피를 마시고 가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취재 당일 만났던 한 고객은 "몇 달 전 지나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다. 처음엔 카페인 줄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까 카페였다"며 "그 후에 생각이 많고 뭔가 정리할 게 있을 때면 이곳을 찾곤 한다"고 말했다. 그 고객은 몇 시간을 머물다 갔다.

"정말 신기한 건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가요."

사이펀 커피가 주는 의미와 위로
 
사이펀 커피가 내려지고 있는 모습.
 사이펀 커피가 내려지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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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정서에서는 사이펀을 이용해 커피를 내린다. 알코올램프로 가열을 시작하고 그 위에 커피 가루를 넣으면 아래의 공기가 뜨거워지면서 수증기가 위로 올라가는데, 그때 공기구멍을 막아주면 아래 플라스크에 있던 공기가 차단되면서 압력이 팽창된다. 그러면 아래에 있는 물이 위로 올라오며 곧 커피 표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이것은 뜨거움과 차가움의 원리로 만들어진 커피 추출방식으로, 뜨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내려오는 자연현상의 이치와 같은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김봉희 사장은 사이펀 커피가 추출되는 과정을 통해 늘 소용돌이치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제일 처음 제 마음의 뜨거움은 사랑할 때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분노였어요. 이런 감정들이 언젠가는 터져 나오게 되고,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분노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층을 이루면서 거품, 찌꺼기, 커피 물로 분리가 됨을 알게 됐죠. 이처럼 저의 감정에서도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들이 분리되더라고요. 언제까지 뜨거울 수만은 없잖아요."

김봉희 사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이는 위로를 받을 것이고 또 누구는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녀는 늘 그곳에서 모모처럼 카페를 찾는 이들에게 곁을 내어주고 있었다.

김봉희 사장에게는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있다. 이러한 섬세함이 '천천히', '차분히'와 맞닿아 있어 사람들을 '정서'로 발길을 옮기게 하고 그 안에서 쉼을 찾게 한다.

과도한 질주가 펼쳐지는 현대사회에서 궤도를 이탈한 것만 같은 카페 정서에서의 시간은 사람들에게 안정과 위로를 주기에 충분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공간에서 '정서'를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커피를 내리며, 빈 깡통이나 버려지는 물건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저 그녀의 삶일 뿐이다.
 
글·사진 최시연 i-View 객원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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