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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를 마감하는 1800년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가 사망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를 대리하여 권력을 잡은 정순왕후가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서학을 배척하는 준엄한 명을 내리는 것으로 19세기의 문을 열었다.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신유박해의 시작이었다.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등 조선인 천주교도와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등 신도 100여 명이 죽임을 당하고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를 당하는 일로 조선의 19세기가 시작되었다.

조선이 배척한 서구는 산업혁명으로 이룬 경제력과 무기 생산력, 계몽사상에서 싹튼 법치주의와 시민 정신을 앞세워 세계 곳곳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최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귀족은 차, 노동자는 커피

유럽 제국주의를 선도한 것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었다. 지난 세기에 식민지 미국을 잃었지만 400년 동안 눈독을 들여왔던 면직물의 나라 인도와 커피의 땅 실론섬을 손에 넣었고,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였다.

프랑스는 왕정과 공화정을 반복하면서도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인도제도, 남태평양, 인도양 일대에도 적지 않은 영토를 확보했다. 러시아,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또한 열강에 합류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세기 마지막에 등장한 열강은 미국이었다. 루이지애나와 알래스카를 프랑스와 러시아로부터 사들이고, 멕시코 및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쿠바, 하와이, 괌,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도 미국은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 앞장섰고, 1882년 조선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20세기 조선 역사에 개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899년에는 '문호개방' 정책을 선언하며 중국의 이권 쟁탈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19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거장들의 시대였다. 미술에서 세잔·고흐·고갱·마네·밀레·드가·르누아르, 음악에서 베토벤·멘델스존·슈베르트·바그너·브람스·베르디·차이코프스키·리스트·쇼팽·드보르작·생상스, 문학에서 모파상·졸라· 빅토르 위고·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이 마신 음료가 커피였고, 이들이 교류하는 곳이 카페였다. 이런 거장들이 베푸는 문화적 혜택에서 조선을 포함한 대다수 비서구, 비백인, 비기독교 국가들은 당연히 배제되어 있었다.

방적 기계 개량을 계기로 영국에서 1760년대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산업 부문에서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농업과 수공업 중심의 산업을 공업과 기계 중심의 산업으로 전환시킨 경제 혁명으로서의 의미가 가장 컸지만, 경제를 넘어 인간 생활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농업 부문의 축소와 공업의 성장은 공장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출현을 가져왔고, 많은 농촌 출신 노동 가능 인구가 삶의 본거지를 떠나 도시로 향하게 했다. 목축업을 위해 농민을 내쫓은, 이른바 인클로저운동으로 토지에서 추방된 농민 계층은 도시 노동자가 되었다. 여기에는 아동과 여자까지 포함되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하루 12시간 이상, 길게는 18시간이라는 긴 노동 시간에 시달려야 했고, 여성들이 가정에서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들이 흘린 땀의 대가는 공장 주인에게 돌아갔다. 땀을 흘리지 않고도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젠트리(gentry) 계층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영국 신사를 상징하는 젠틀맨이다.

시간이 많은 젠틀맨들은 여유롭고 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던 반면에, 바쁜 노동자들은 간편한 먹거리를 찾아야 했다. 특히 서둘러야 하는 아침 식사에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런 필요에 부응한 것이 바로 커피였다. 따뜻한 커피를 통해 최소의 영양분과 활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커피는 훌륭한 아침 대용품이었다. 알코올이 들어 있는 맥주나 긴 조리 시간이 필요한 수프보다는 정신을 맑게 해주고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커피가 환영받았다.

수백 년 동안 귀족이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커피가 노동자들의 일상 음료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커피가 노동자들의 음료가 되는 대신 귀족들은 차를 선택했다. 영국 왕실 여성들의 차 선호 경향이 귀족 사회의 커피문화 쇠퇴를 가져왔다는 해석도 있다.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 출신 캐서린 공주, 메리 여왕, 앤 여왕 등이 특히 차를 좋아했다. 차의 유행으로 카페는 쇠퇴했고, 커피는 노동자들과 여성들이 가정에서 마시는 음료로 변했다.

영국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커피의 일상 음료화는 산업화의 확산에 따라 영국을 넘어 대륙으로 번져 나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커피는 유럽에서 이미 오늘날의 커피와 같은 의미를 획득하였다. 특히 날씨가 추운 북유럽에서 환영받았다.

물론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선택된 기호식품에 커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은 양으로 쉽게 취함으로써 노동이 주는 피로를 잊게 해주는 브랜디도 있었다. 브랜디는 과일의 발효액인 와인을 증류시켜 생산한 증류주다. 주로 퇴근 후에 빨리 마셔서 일찍 취하고, 일찍 잠에 빠지게 하는 장점이 브랜디의 유행을 불러왔다. 그래서 산업혁명이 대중화시킨 2대 음료로 커피와 브랜디를 꼽는다. 커피가 낮의 음료였다면 브랜디는 밤의 음료였다.
 
1800-1,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0-1,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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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반영 정책

프랑스 시민들에게 값싼 커피를 무한정 제공할 것 같았던 카리브해의 생도맹그(현재의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의 차지가 되었고, 프랑스인들이 커피를 처음으로 옮겨 심었던 섬 마르티니크는 영국이 차지하였다. 프랑스는 식민지와 더불어 값싸고 맛있는 커피를 잃었다. 프랑스는 식민지로부터 쉽게 가져오던 커피 대신 네덜란드가 공급하는 자바 커피나 영국이 1802년에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식민지화한 실론에서 생산하여 제공하는 커피를 비싼 값에 마셔야 했다.

이런 변화의 시대, 커피 대중화의 길목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1789년의 대혁명으로 이룬 정치적 변화를 지켜보던 군인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그가 30세가 되던 1799년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사망한 해였다.

스스로 만든 헌법에 따라 공화국의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훗날 나폴레옹법전이라고 불리게 된 민법전을 토대로 법치주의, 능력주의, 시민 평등사상 등 근대적 정신을 유럽 전체에 전파하였다. 공교육 개혁을 통한 인재 양성도 그가 힘썼던 분야였다. 이런 업적들은 그의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많이 쓰이지는 않았지만 인류 문명사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그의 흔적들이다.

비록 인도 정벌이나 서인도제도 식민지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국가 관리와 주변국 관리에서 공을 세운 프랑스인 나폴레옹을 위해 독일인 베토벤이 1803년부터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작품번호 55' 작곡을 시작하였고, 1년 후 완성곡에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1804년에 프랑스 제국의 황제 자리에 스스로 오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알렸다.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에 실망한 베토벤에 의해 교향곡의 명칭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고 곡명이 '영웅 교향곡'으로 바뀌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제외한 모든 독일 국가들이 나폴레옹 1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는 1806년에 스스로 물러났다.

황제 나폴레옹은 남으로 스페인과 로마, 동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북으로는 프로이센, 스웨덴,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륙 국가들을 굴복시키거나 자신의 지지자로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런 그에게 남은 숙제는 단 하나였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여러 차례 패배의 쓴맛을 안겨 주었던 바다 건너 영국을 굴복시키는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앙숙 관계는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한 이래 악화되어 왔다. 세계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백년전쟁(1337~1453)은 그런 두 나라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전쟁이었다.

훗날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영국의 성공은 바로 프랑스의 실패이고, 영국의 이익은 바로 프랑스의 손실이다"라고 선언한 것이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잘 말해 준다. 역사 속 한일관계와 다르지 않다. 나폴레옹의 반영국 정책으로 프랑스인들은 대용 커피, 가짜 커피를 마셔야 했고, 이는 다시 두 나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2021.
趙濤·劉揮, 박찬철 옮김, 《세계사를 바꾼 15번의 무역전쟁》, 위즈덤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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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교수이며 커피인문학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커피세계사 한국가배사>(2021), <한국교육 제4의 길을 찾다>(2019), <세계의 교과서 한국을 말하다>,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교육>(2015), <20세기 한국교육사>(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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