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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길 검사가 처형당하기 직전 포승줄에 묶여 무죄를 호소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박금만 화백 작품. 오른손에는 작은 성경책을 들고 있다. 박 검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을 상징한다.
▲ 박찬길 검사 박찬길 검사가 처형당하기 직전 포승줄에 묶여 무죄를 호소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박금만 화백 작품. 오른손에는 작은 성경책을 들고 있다. 박 검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을 상징한다.
ⓒ 박금만 화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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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여순사건 당시 '인민재판장'을 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경찰 진압군에게 총살당한 박찬길 검사 사건에 대한 수사기록이 72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법무부, 국방부, 경찰청, 국가기록원 등에선 '부존재'하다고 계속 밝힌 자료가 역사편찬위원회의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 형사사건기록' 속에 들어 있음이 확인됐다. 이는 검경 갈등의 뿌리와도 같은 박 검사 총살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전망이다.

박찬길 검사(1910~1948)는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숭실전문학교(숭실대 전신)와 일본 동경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45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그해 11월부터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서울지검 검사 시보 생활을 하다가 1947년 11월 7일부터 이듬해 10월 사망할 때까지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 검사로 일하였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박 검사는 자신과 가까운 황두연 의원(1905~1984)에게 "여수 주둔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를 점령하고 순천으로 진격차 열차로 올라온다는 정보"이니 "서둘러서 피신하시라. 저도 피신간다"는 말을 남기고 곧장 떠났다. 그 뒤 진압군이 순천을 탈환한 23일, 박 검사는 경찰에 체포돼 무수히 구타를 당하였고, "폭도들의 인민재판장을 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24일 아침 20명의 시민과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누명 벗자 사건은 덮였다

현직 검사가 "인민재판관으로 활동해 사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은 1948년 10월 28일 국회 본회의(제90차)에서 내부부장관 윤치영의 보고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박 검사처럼 인민재판에 배석했다는 누명을 쓰고 경찰에 붙잡혀 처형당할 위험에 처했다가 겨우 빠져나온 황두연 의원 사건 논란 중에 간간이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유족의 탄원으로 1949년 봄부터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요구가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법무부는 1949년 2월 말부터 6월까지 광주지방검찰청 등을 대상으로 박 검사 사건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 그리하여 박 검사와 20명의 시민이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음을 확인하고 이를 '법치를 무너뜨린 중대한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그해 8월 군 · 검 · 경 합동수사반을 구성하고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사건 수사를 맡은 광주지검 기세훈 검사는 9월 19일 언론 브리핑을 열고 여순사건 당시 군경진압부대가 박찬길 검사와 광주지법 순천지원 서기 방기환(30)씨 등을 총살하였지만 이는 "하등근거 없는 조치였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박찬길 검사, 방기환 서기 등 21명이 무고히 처형당하였음이 드러났어도 그 처형에 관여한 경찰관 누구도 제대로 처벌 받지 않은 채 사건은 덮이고 말았다. 총살형은 당시 제8관구경찰청 부청장 최천씨가 강행한 혐의가 짙고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주도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전국 경찰들이 총파업을 벌이며 저항하자 '불문에 부치라'는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사건이 유야무야되고 만 것이다.

1949년 10월 국회에서는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었다. 김봉조 의원을 비롯한 여러 의원은 좌익이 아닌 박 검사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데 대한 책임 추궁을 계속하였다. 법무부장관 권승렬은 "박 검사가 다른 검찰관에 비해 큰 차이가 없고 좌익사상에 불공평한 일을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박 검사가 직무상 무슨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다"고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자들의 책임을 묻는 일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을 다룬 1949년 약 2백쪽 분량의 검찰의 수사기록(1949. 8.29~9. 13일 생산).
▲ 최천 외 2명에 대한 살인 피의사건 기록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을 다룬 1949년 약 2백쪽 분량의 검찰의 수사기록(1949. 8.29~9. 13일 생산).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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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찾은 수사 자료


기자는 2018년 11월 "박찬길 검사 사건 관련 정부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와 국가가 유족들에게 조치한 서류"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하였다. 이에 법무부는 "보존 서류가 아니라 공개가 불가하다"고 회신하였다. 혹시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나 해서 국가기록원에도 정보공개 청구했으나 '부존재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최천씨가 1949년에는 경북 경찰국 경무과장으로 근무하였기에 사건 기록이 대구지검에 넘어갔다는 언급이 있어 그곳에도 정보공개 청구를 하였다. 하지만 대구지검도 1949년 11월 법원과 검찰청사에 방화사건이 있어 대부분의 자료가 소실되었고 박 검사 자료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에 근무한 박찬길 검사의 '인사기록'이나 '근무기록'은 있을까란 생각에 알아보았지만, 역시 '부존재'하였다. 국방부와 경찰청도 합동 조사를 벌였기에 수사 자료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두 부처에도 정보공개 청구를 하였지만 허사였다. 박 검사의 아들인 박경진 목사도 올해 7월 법무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하였으나 '정보 부존재'라는 전화 문자 회신만 받았다. 군 · 검 · 경 합동 조사가 이루어진 중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어찌 이처럼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기자는 지난 5일 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을 하다가 수사 자료를 찾았다. 검색창에서 '박찬길'이란 단어를 넣었더니, 도서 중에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 해제'라는 것이 떴다. '일제강점기'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클릭했더니 제목에 박찬길 검사 사건의 주요 책임자로 알려진 '崔天(최천)'이란 이름이 떴다. 편철명은 '崔天 외 2명에 대한 살인 피의사건 기록'(생산연도는 1949년)이었고 내용은 범죄 인지서와 피의자 신문조서, 증인 신문조서 등으로 돼 있는 기록물이 간단한 해제와 함께 있었다. 비록 고어와 손 글씨로 휘갈겨 쓴 한자투성이 기록물이지만 원문이 스캔돼 있어 누구든 간단한 검색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박 검사의 아들 박경진 목사의 요청으로 숭실대학교가 찾아낸 박찬길의 졸업 사진
▲ 박찬길의 숭실전문학교 졸업사진 박 검사의 아들 박경진 목사의 요청으로 숭실대학교가 찾아낸 박찬길의 졸업 사진
ⓒ 박경진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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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박 검사와 그 부친

수사 기록에는 여순사건 당시 박찬길 검사와 방기환 서기의 행적과 총살, 경찰이 자행한 박 검사 부친 살해, 사건 조작 은폐에 이르기까지 참혹한 증언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여순사건이 터지고 여수 14연대가 순천으로 진격할 무렵 순천지청에서 숙직하던 직원들은 새벽 3시께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그 뒤 이른 아침부터 총격 소리가 들리자 출근한 직원들은 저마다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증언에 따르면 그 무렵 박 검사도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L씨의 집 장작더미 속으로 숨었다. 23일 아침 9시경 그의 동료 Y씨가 찾아와 '반란이 진압됐다'는 소식을 전해줘 밖으로 나왔고, 그 동료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진압군을 만나 군인 차량에 타게 됐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순천북초등학교였다. 그곳에는 진압군의 명령에 따라 벌써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있었다. 경찰 진압대는 시민들을 직업별로 구분한 뒤 '양민과 비양민(좌익)'으로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박 검사는 동료 직원들을 만나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까지 쏟았다고 한다.

이때 사복과 정복을 입은 4~5명의 경찰이 몰려오더니 박 검사를 지목하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최천 부청장도 그를 구두 발로 구타하고 뺨을 쳤다. 이 소식을 들은 박 검사 부인이 "어찌된 일이냐" 하였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말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들은 곧 박 검사를 본부석 뒤쪽으로 끌고 갔기에 대중들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마침 황두연 의원이 그곳에 왔기에 박 검사 부인은 황 의원에게 남편의 구제를 호소하였다. 이에 황 의원은 경찰 책임자인 최천에게 가서 "현직 검사를 이렇게 폭도 혐의로 구타하면 안 된다"며 방면을 요구하였다. 최천은 "경찰들이 나쁜 놈이니 죽여야 한다고 해서 붙들어 두었으니 두고 보자"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인 구례인 선교사(John Crane, 1888~1963)도 "박 검사는 내 친구이고 기독교인이며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신원 보증을 할 테니 풀어 달라"는 내용의 자필 탄원서를 최천에게 전하였다. 최천은 이 탄원도 묵살하였다.

이튿날인 24일 오전 8~9시 사이 경찰 진압대는 박찬길 검사, 방기환 서기를 비롯한 21명을 총살했다. 운동장에서 날밤을 새운 시민들은 총소리만 들었지 그 현장은 보지 못하게 해서 볼 수 없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 총살 현장에는 최천과 경찰 30명 남짓이 있었다. 피의자 박○○은 5.10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박 검사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박 검사가 '인민재판장을 하였다'거나 '좌익을 관대히 처리한다'는 경찰의 명분은 꾸며낸 거짓에 불과하였다. 박 검사의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게 그의 동료 증언이다.

경찰 진압대의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천경찰서 사찰계 주임 배○○은 그의 계원 박○○에게 지시해 29일 집에서 박 검사 부친 박인서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박찬길 검사 부친이다"라고 하자 경찰들은 너도나도 달려들어 그를 구타하였다. 박 검사 부친은 그 구타로 세 시간도 안 되어 사망하였다. 그러자 경찰은 그 시신을 트럭에 실어 모처에 유기하여 유족들이 시신 수습조차 못하게 하였다. 나아가 박 검사 부친이 경찰 아무개를 반란군에게 밀고해 처형당하게 했다는 허위 문서를 작성해 사건을 조작하였음이 드러났다. 이는 피의자 박○○의 자백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피의자가 범죄 사실을 자백까지 한 이 끔찍한 살인 사건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박 검사의 아들 박경진(75) 목사는 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버지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기록이 나와서 다행이다"라며 "중요한 건 명예회복이 되는 거다. 저도 나이가 70대 후반이 되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데 생전에 아버지 명예가 회복되길 기원하고 정부도 사건을 덮으려 말고 유족의 아픔을 이해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사건 해결에 협력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박찬길 검사 총살사건을 다룬 수사기록이 72년 만에 드러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여순사건 당시 경찰 진압부대의 무분별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재조명할 길이 열렸다. 마침 지난 6월 29일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상황이라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진실 규명 작업은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싣습니다.


태그:#박찬길 검사, #여순사건, #여순사건 특별법,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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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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