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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방언을 쓸 때와 표준어를 쓸 때, 한국어로 말할 때와 영어로 말할 때, 회사에서 회의할 때와 친구들과 말할 때, 쓰는 언어가 달라지는 코드 전환이 일어난다. 즉, 다른 페르소나, 다른 운영체계가 활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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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언어를 배울 때마다 새로운 페르소나를 장착하게 된다면 새로운 능력까지 탑재할 수 있게 될까? 어떤 외국어를 배우면 예전에는 몰랐던 것이 갑자기 보이거나 이해되기도 할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페리윙클(periwinkle)이라는 색깔 이름이 있다. 연보라색 같기도 하고 옅은 하늘색 같기도 한 이 색깔 이름은 한국어에는 없다. 하지만 영어에는 있기 때문에 영어 사용자들은 페리윙클의 범위를 딱 집어낸다.

한국인들 눈에는 그 색깔이 그 색깔 같은데, 영어 사용자들은 여기서까지는 보라색이고, 여기서부터는 페리윙클이고, 여기서부터는 하늘색이라고 인식해낸다. 색 인식 능력은 동일하게 타고났지만 언어에 의한 자극으로 미묘한 구분이 가능해진 것이다.

러시아어에는 파랑이라는 단일한 단어가 없고 밝은 파랑голубой(골루보이)과 짙은 파랑синий(시니)이라는 두 개의 색깔 이름이 있다. 영어에는 파랑(blue)이라는 하나의 단어만 있다. 과연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파란색의 색조를 더 잘 구분할까?
    
러시아어 사용자는 대체로 1번~9번까지를 하나의 색깔(골루보이), 10번~20번까지를 하나의 색깔(시니)로 인식한다. 10번과 12번을 볼 때에 비해, 8번과 10번을 볼 때 '앗! 다른 색이다!'라고 더 빨리 인식한다.  

https://www.pnas.org/content/104/19/7780 (논문의 공개된 그림)
▲ 옅은 파랑부터 짙은 파랑까지 연속적인 단계 러시아어 사용자는 대체로 1번~9번까지를 하나의 색깔(골루보이), 10번~20번까지를 하나의 색깔(시니)로 인식한다. 10번과 12번을 볼 때에 비해, 8번과 10번을 볼 때 "앗! 다른 색이다!"라고 더 빨리 인식한다. https://www.pnas.org/content/104/19/7780 (논문의 공개된 그림)
ⓒ https://www.pnas.org/c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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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색깔표는 파랑을 진하기로 20단계로 나누어 놓았다. 인접한 색깔은 언뜻 보면 비슷해 보여서 같은 색인지 다른 색인지 바로 알아차리기 힘들다.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사진의 9번 색깔쯤에서 골루보이(밝은 파랑)와 시니(짙은 파랑)가 갈린다고 느낀다. 실험 결과 카테고리가 같은 골루보이(1~9번)과 시니(10~20번) 안에서 색깔을 구분해낼 때보다, 골루보이와 시니로 카테고리가 달라질 때 더 빨리 다른 색임을 감지해내는 것이 드러났다.

같은 골루보이인 6번과 8번을 볼 때는 다른 색인지 알아차릴 때 시간이 걸리지만, 골루보이인 8번과 시니인 10번을 보면 금세 '어! 두 가지는 다른 색이다!'라고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영어 사용자들에서는 이런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어 학습자가 한국어의 '답답하다' '시원하다'라는 표현을 배우면서 이 표현이 담당하는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 내가 그동안 이러이러할 때 느꼈던 게 '답답함'이었구나. 이 표현을 쓰니까 시원하다. 답답하다는 말을 안 쓰고 어찌 살았을까?' 어렴풋이 존재했지만 언어화되지 않고 무의식과 의식에 경계에 있던 감정이 한국어를 배우면서 일깨워지고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영어를 배울 때도 한국어에 없는 과거완료, 현재완료, 미래완료 등의 시제를 이해하고 활용하려 애쓰다 보면, 운영체계 깔리듯 새로운 타임라인이 탑재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절대 방위를 사용하는 쿡 타요레 언어 

호주 원주민부족이 쓰는 쿡 타요레(Kuuk Thaayorre)라는 언어를 배우면, 심지어 절대 방향 감각마저 습득될지도 모른다! 쿡 타요레 언어에서 절대 방위는 동쪽-서쪽, 그들의 사는 지역의 해안선(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음), 강(지그재그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름)의 여섯 방향을 표현하는데, 거의 모든 문장을 말할 때마다 절대 방위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 "네 오른쪽에 있는 후추 좀 건네 줄래?"라고 말할 상황에서 쿡 타요레어로는 "남서 방향에 있는 후추 좀 건네 줄래?"라고 말한다. 연구 결과 이들은 빛을 완전히 차단한 지하에서도 방향을 찾을 수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들은 시간을 우리처럼 우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들은 해의 움직임처럼 시간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고 느낀다. 한 아기가 점점 자라서 어린이가 되고 어른이 되고 중년, 장년, 노년이 되어가는 사진 10장을 주고 시간순으로 배열해보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자기 앞에 놓인 책상에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죽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타요레 사람들은 동쪽에 아기 사진을 놓고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어른, 노인 사진을 놓는다. 북쪽을 보고 앉았다면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늘어놓고, 동쪽을 보고 앉았다면 몸에서 먼 쪽부터 몸에서 가까운 쪽으로 늘어놓는 것이다! 절대 방위 감각이 시간의 공간 표상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절대 방위가 있는 언어를 배우면, 절대 방향 감각이 생겨나는 것일까? 언어가 지각을 지배한다는 주장을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 하는데, 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이고 <어라이벌>(한국제목 '컨택트')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관점 또는 새로운 능력이 생길 수 있다는 가설은 아직까지 정설은 아니다. 하지만 쿡 타요레 언어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이 언어를 배우면 나같은 길치도 동서남북이 표시된 지도가 쫙 펼쳐진 것처럼 세상이 달리 보일까 궁금하다.

인간도 무의식적으로는 자기장의 변화를 감지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타요레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자기장의 감지를 언어적 자극을 통해 의식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수 있다. 

그런데 쿡 타요레의 네이티브 스피커가 2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점점 더 사멸해갈 것이다. 이 언어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언어에 밀려 사어가 된 과거의 언어들이 갖고 있었던, 우리가 영영 알지 못할 지혜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 말고도 다른 동물들도 자신들의 종이 간직한 지혜를 자신들의 언어에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돌고래들은 초음파로 소통하기 때문에, 우리가 초음파 검사로 뱃속을 들여다보듯 몸속을 훤히 들여다본다. 돌고래들이 임신부 여성들과 임신한 돌고래들을 특히 좋아하고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그 안의 아기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돌고래뿐 아니라 영장류를 포함한 포유류, 조류, 양서류, 어류, 연체동물들... 모든 종들이 고유한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인간이 오만하게 착취하고 잔인하게 멸종시켜가는 종들이 간직한 지혜는 어떤 것들일까. 더 늦기 전에 그 언어를 들을 자세를 우리가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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