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4 07:27최종 업데이트 21.10.14 07:27
  • 본문듣기

강보름 연극 연출가. ⓒ 유성호

 
부끄러움이 불러온 변화

부끄러움은 흔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된다. 부끄러움은 어떤 문제에 대해 도망치고 회피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문제를 바로 잡게 한다. 부끄러움이 나에게 밀려올 때 전자를 택할지 후자를 택할지는 결국 자기 자신의 몫이다.


강보름 연극 연출가는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부끄러웠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도망치지 않고 삶을 변화시키는 실천을 하는 예술가다. 그는 청년, 여성, 예술가, 비장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사회 속에 놓이는 위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불편한 감각으로 새로운 예술적 탐구를 해나가는 연극 연출가라 할 수 있다. 지난 9월 6일,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눴다.  

-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것을 알고 있다. 국어교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연극 연출가의 길을 택한 계기가 궁금하다. 
"어차피 인문학을 한다고 해서 취업이 잘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대학 때 국어교사를 하기 위해 교생 실습을 나갔다가 겪게 된 일로 생각을 아예 접게 되었다. 교생실습을 나간 때가 2014년 4월이었다. 교생 실습을 나간 학교는 나의 모교였다.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아침마다 나는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수거하는 일을 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에도 같은 일을 했다. 그때 교실에서 세월호 참사의 뉴스를 학생들과 보게 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휴대전화가 수거되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마다 나에게 세월호의 상황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뉴스로 세월호의 상황을 보았지만, 학생들에게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을 했다. 세월호에 대한 오보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 표현이 맞을진 모르겠지만 그날 수치심이 들었다. 참사 당일에 수업을 어떻게 끝마쳤는지 모를 정도였다. 혼란스러웠고, 트라우마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연극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교생 실습을 나간 후에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전한 작업환경을 함께 만드는 사람들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은 공연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안전한 창작환경’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규약집이다. ⓒ 유성호

 
- 본격적으로 연극 연출을 하면서 'KTS(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예술계는 워낙에 다층적인 현황과 문제를 가진 현장이다 보니 예술환경에 대해 이렇다 할 기준이 만들어지고 있지 못한 현황이다. KTS는 무엇이고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KTS(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연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안전한 창작환경'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규약집이다. 이 활동은 2018년 연극계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미투 운동 이후,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폭력과 위계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고민했다.

미투 이전에는 창작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개별적으로 고민을 했었다면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과 KTS 워킹그룹(Korea Theatre Standards Working Group)이 발족하고 난 후에는 '같이' 고민해보자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모아졌다. KTS 워킹그룹은 2019년부터 2주에 한 번씩 모여서 주제별로 이야기를 나눴고, 2020년에는 그동안의 자료를 모아 자료집 형태로 만들었다. 그 후에는 자료집을 가지고 극단이나 지역의 단체와 함께 워크숍을 하게 되었다."

- 어떤 계기로 KTS 워킹그룹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2018년 초에 연극계 미투 운동이 벌어졌다. 그 1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에도 연극계의 위계가 심하다고 느꼈다. 극장과 선배의 갑질을 겪었는데 비전공자라서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부당한 무시를 받지 않기 위해 대학원에 간 것도 있었다. 연극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연극계의 모임들은 나이, 혹은 경력으로 미묘하게 구분되어 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데, KTS 워킹그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임이었고, 누가 와도 동등한 위치에서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KTS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은 한두 명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약 32명의 예술가가 모여서 만들었다. 워킹그룹 모임 초기에는 미국 배우 로라 피셔와 시카고에 있는 극단 대표, 예술가, 행정가들이 자신의 시간, 경험, 전문성을 자발적으로 보태 저술한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CTS)'를 공부했다.

미국 역시 여러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된 후 시도된 과정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국내외 사례들을 살펴보며 한국의 현실에는 어떤 규약이 맞을지 한 문장 한 문장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세션에 참여한 건 아니지만 변화를 열망하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들이 당시를 버티게 해주는 동력이었다."
 

공연예술가들이 만든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 유성호

 
- KTS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KTS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은 현장의 창작자들이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내용을 보면 연극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들이 서로 존중하는 법에 대해 제안하고 있다.

작업을 시작할 때 동료들과 '안전한 창작환경이란', '괴롭힘과 차별이란', '위계폭력이란' 등의 내용을 다 같이 읽고 시작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폭력이 무엇인지, 그동안 연극 활동을 하면서 부당하다고 느껴졌던 것과 스트레스는 무엇이었는지, 내가 존중받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통의 기준선을 합의해나간다.

예를 들어 새롭게 든 문제의식으로는 일방적인 식이지향이 있다. 채식주의자도 있는데 음식을 주문할 때 고기만 시키는 등의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한다. 서로 어떤 호칭으로 부를 것인지 합의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지역 워크숍을 통해 다양한 지역의 창작자들을 만나면서 이 규약들이 서울 중심적으로 정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비장애 중심적으로 규약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집필진 중에 장애인이 없었다. 자문을 받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KTS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을 발간했을 때의 취지가 완벽한 규약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적 감수성에 따라 함께 수정·보완을 하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모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와 퀴어를 교차하는 연극

- 자연스럽게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창작하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강보름 연출가는 최근 비장애인들 위주의 공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공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0set프로젝트와 극단 애인의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장애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소수자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했다면, 장애를 공부하면서는 비장애인인 다수자로서의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교차하는 나의 정체성 안에서 동료-되기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연극 <여기, 한때, 가가>포스터 ⓒ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 얼마 전에 직접 연출을 맡은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드는 공연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었던 공연과는 다른 맥락에서 감각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연극 <여기, 한때, 가가>는 배해률 극작가의 작품이다. 레이디 가가라는 미국의 팝스타가 한때 서울 성북구에 허름한 빌라를 소유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빌라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계급적, 젠더적으로 소수자 퀴어들이고 변두리로 밀려나 살고 있다. 퀴어한 희곡을 장애/비장애 배우가 함께 연기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는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했다. <여기, 한때, 가가>는 장애와 퀴어를 교차시켜보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페미니즘 연극제와 잘 맞아서 참여하게 되었다."

- 스스로 비장애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작업하는 것은 어떠한가? 혹시 당사자성에 대한 한계가 있지는 않았나? 
"연극은 혼자 만들 수 없는 매체이다. 당연히 한계는 매일 느끼고 있지만, 창작하면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의 이야기, 나의 관점으로 체화가 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장애나 젠더가 스펙트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정체성을 넘어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싶다. 연극을 통해 이성애 중심, 비장애 중심, 주류 중심적인 부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연극 안에서 소수자의 서사를 다룰 때 동일한 정체성 내에서 동일한 계급적 조건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소수자라면 여성과 퀴어, 청소년 등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어도 비슷한 계급적 조건에 처해 있을 수 있다. 연극 <여기, 한때, 가가>는 그런 맥락을 다루고 있다. 서울의 한 허름한 빌라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있듯,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장애창작자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었을 때는 내가 그 세계를 모른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고, 지금까지 그것을 무심하게 넘겨버리고 살았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창작자들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하는 현실이 문제였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철저히 분리된 사회라는 것을 느꼈고 동료로서 더 만나보고 싶어졌다.

한정된 예산과 시간 내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에 배리어프리((barrier-free, 극장에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없애기 위한 운동) 공연을 한다면 극장에서 누구와 만나고 싶은지, 어떤 배리어를 왜 허물고자 하는지 질문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려면 장애인 창작자들과 함께 공연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배리어프리 공연을 만들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진행 중인 배리어프리 공연들을 찾아보면 좋겠다. 장애인 창작자(장애인 극단)들이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장애인 창작자들을 섭외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나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웃음) 장애인 창작자들과 작업을 하면서 동료가 된다는 것의 의미와 재미를 알게 되는 것 같다."
 

강보름 연극 연출가. ⓒ 유성호

 
- 다음 차기작은 어떤 것을 할지 궁금하다.
"11월 말에 국립극단 <창작공감: 연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장애, 비장애 동료들과 <미스핏 극장>을 주제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쇼케이스로 처음 선보이고 본 공연은 내년 5월에 하게 될 것 같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뇌병변장애인, 비장애인 배우들의 자기 서사를 바탕으로 일종의 참여형 공연이다."

강보름 연출가와 대화하면서 나는 얼만큼 나의 부끄러움에 맞서고 있는지를 되물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공연티켓을 사고 버스를 타고 연극을 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투쟁 구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 역시 꽤 늦게서야 깨달았다.

강보름 연출가가 장애인 창작자들과 만들고 있다는 공연이 시작되면, 이제는 나도 친애하는 나의 장애인 친구에게 말할 것이다. '나가자, 그리고 연극을 보러가자'."
  

연극 <여기, 한때, 가가>의 무대 위에 배우들 ⓒ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