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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신익희 후보 유세차
 민주당 신익희 후보 유세차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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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정치사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은 돋보이는 인물이다.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후광을 바탕으로 민주적인 리더십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도드라진다. 하나는 지극히 권위적이요 행정부의 수반인 이승만과 대좌하여 입법부의 독립성과 권위를 지켜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소집되어 최연장자인 이승만이 의장, 해공이 부의장에 선출되었을 즈음 국회의 한 장면이다. 

이승만 의장은 우리말 표현에 서툴렀고, 법률적ㆍ사무적인 일에도 서툴러서 사회를 볼 때에는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익희 부의장과 사회를 바꾸어 진행했다. 이 의장이 대통령이 되자 신 부의장이 의장이 되었는데 신 의장은 신언서판을 갖춘 분으로 능란하게 사회를 하였으며, 가끔 사회를 부의장에게 맡기고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주석 6)
1951. 6. 25. 부산, 정부 3부 요인들이 6.25 1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전쟁 전몰장병에게 묵념을 드리고 있다(단상 앞 열에는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이승만 대통령, 김병로 대법원장, 장면 국무총리 등이 서 있다).
 1951. 6. 25. 부산, 정부 3부 요인들이 6.25 1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전쟁 전몰장병에게 묵념을 드리고 있다(단상 앞 열에는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이승만 대통령, 김병로 대법원장, 장면 국무총리 등이 서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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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친일분자들을 처리할 때 이승만 세력이 두 차례에 걸쳐 날조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현역의원 13명을 구속하는 등 국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리고 부산정치파동 당시 정부안의 일부 극우세력이 국회해산을 모의할 때, 이 대통령과 만나 부당한 처사를 따지는 등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후일 '원 맨' 이 박사와 마주 앉아 당당히 1 대 1로 사리를 따질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정치인이 해공이었다는 것도 그가 비단 국회의장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며, 원숙한 정치수완 속에 감추어진 혁명가적 기백에서 솟아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던 것이다. (주석 7)

다른 하나는 공직자로서의 청렴성을 지키면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인 것이다. 자기가 만든 국민대학과 떠맡아 육성한 신문사를 관계자들에게 넘겨준 것이나 사저를 공관으로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고 전세생활을 감당한 것은 본인도 본인이지만 가족의 공감이 없으면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만큼 '수신제가'의 수범을 보여주었다. 
 
국회의사당 본관 로텐더홀에 설치된 '제헌국회기념조형물'. 이 조형물엔 제헌국회 단체사진을 토대로 제헌의원 198인과 당시 국회 사무총장 등 모두 199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조형물 오른쪽으로 보이는 동상은 제헌·2대국회의장인 신익희 선생.
 국회의사당 본관 로텐더홀에 설치된 "제헌국회기념조형물". 이 조형물엔 제헌국회 단체사진을 토대로 제헌의원 198인과 당시 국회 사무총장 등 모두 199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조형물 오른쪽으로 보이는 동상은 제헌·2대국회의장인 신익희 선생.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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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대단히 실용주의적인 정치지도자였다. 흔히 다수의 정치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구름 잡는 식의 허장성세를 일삼는데 비해 그는 항상 현실에 바탕한 정책과 방략을 추구했다. 하지만 원칙이 짓밟힐 때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부산피난 시절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발췌개헌에 이어 사사오입개헌을 감행하자 분연히 일어나 여야, 무소속의원 60명을 이끌고 호헌동지회를 조직했다. 호헌동지회는 한국 정통야당의 원조격인 민주당의 뿌리가 되었다.

해공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이 1인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영구집권에 나서자 1950년 초, 

 1. 반공ㆍ반독재
 2. 대의정치 및 책임정치 확립
 3. 민주우방과의 협조체제 제휴를 통한 평화적 국제질서 등을 골자로 하는 신당발기 취지문을 직접 쓰고, 민주당을 창당하여 이승만 독재와 맞섰다. 

해공 선생은 식민지→해방→분단→단정수립이라는 변혁기의 중심인물 중의 한 분이었다. 분단정부 참여는 임시정부 주류와는 엇박자의 행보였다. 하여 '노선 선택에서 이중성'이란 평가도 따른다.

신익희는 전통적 소양과 근대적 소양을 균형 있게 접목시키고, 외교ㆍ법률ㆍ내무에 능통한 문인적 풍모이면서도 군사ㆍ무력의 중요성을 아는 지도자, 풍찬노숙의 민족운동가와 합리적 선택에 능한 현실정치인의 면모가 적절히 배합된 드문 인물로 꼽힌다. 

이러한 성향은 한편으로는 그의 폭넓은 사고와 동선(動線)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면모들이다. 이러한 복합성은 때로는 환경의 불가피한 반영이거나 발전적 전환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노선 선택에서 이중성으로 작용하여 비평적 분석을 요구하기도 한다. (주석 8)
신익희 국회의장이 낙하산부대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1953. 11. 18.).
 신익희 국회의장이 낙하산부대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1953. 11. 1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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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아니면 은인자중하여 때를 기다리는 정치가의 금도, 어떠한 위기에서도 그 위기에 탈출구를 만들어 내어 파국을 면하게 하는 조절의 역량, 한번 결의하면 뚫어낼 때까지의 정열, 예각적인 대립 속에서도 화기(和氣)를 잃지 않는 원숙, 이런 것들이 해박한 지식의 구사와 더불어 해공의 활동적인 인격형으로 완성하여 그 억센 파도 가운데서도 찍 소리 없이 대 야당을 이끌어 왔던 것이 아닐까. (주석 9)

우리 현대사는 국가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외세가 만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민족자주의 민주공화제를 실행할 지도자들이 차례로 사라졌다. 여운형ㆍ김구에 이어 해공이 서거하였다.

해공선생이 건재하여 그때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면,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의 늡지에서 기형적으로 성장한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와 같은 변태는 발생하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공선생의 돌연한 죽음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고 대체가 쉽지 않았던 인물로서 정치사의 큰 비극이었다.

해공 선생은 소싯적부터 명필이어서 많은 글씨(휘호)를 남겼다.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애국 시ㆍ어록비에는 '단성보국(丹誠報國)'이라는 휘호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일편단심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자"는 뜻이 담긴다. 대표적인 휘호와 선생의 생애를 가장 충실하게 집약하고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주석
6> 이호진ㆍ강인섭, 『이것이 국회다!』, 59쪽, 삼성출판사, 1988.  
7> 최석채, 「신익희론」, 『정경연구』, 1965년 9월호 99쪽.
8> 도진순, 앞의 책, 94쪽.
9> 최석채, 앞의 책, 10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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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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