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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신익희 후보 유세차
 민주당 신익희 후보 유세차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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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62년 3월 해공선생에게 최고훈장인 대한민국건국장을 추서하고, 딸 신정완 씨는 1968년 3ㆍ1절에 독립유공자로 인정,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80년 광복절에 대통령 건국표창을 받았다. 부녀가 독립운동으로 서훈ㆍ표창받기는 드문 일이다.

1960년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쫓겨나면서 해공선생 동상건립위원회가 결성되고, 1962년 우이동 산소에 묘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정인서가 짓고 글씨는 아들 신하균이 썼다. 
해공 신익희 선생 어록 새겨진 비석
 해공 신익희 선생 어록 새겨진 비석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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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신익희선생 비문

경술국치로 우리 나라의 강토가 왜구에 병탄된 지 30여 년 동안 충의절사로 그 일신을 버리고 가정을 잊으며,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영웅호걸의 기상이 넘치며 빼어나고 두드러진 인재 가운데 해공선생을 넘어설 사람은 없다. 공의 휘는 익희이고, 자는 여구인데 관향이 평산이며, 해공은 그의 자호다.

10세에 경사에 통달하고 성장하며 어린 몸에도 큰 뜻이 담겨 있어 늘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초목과 같이 썩을 수 있으랴"하였다. 드디어 고향을 떠나 상경하여 신학문을 탐구하며 연찬하는 가운데 영어를 전공하였다. 이어 동경에 유학해서는 정치ㆍ경제학을 깊이 연수하며 유학 시절 늘 학업의 길을 닦으면서 국권회복 운동에 앞장섰다. 학문을 크게 이루고 조국의 품에 안기자 보성전문스승에 취임하고 구국하는 일념에 사무쳐 광복 대업의 크나큰 뜻을 펼치기에 죽음으로 맹세하여 밤낮으로 게으름이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이미 끝나고 19년에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려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됨에 공과 동지들은 민족 자결의 대책을 세워 논의하였다. 한 토막의 쇠붙이도 없지만, 맨주먹으로 항쟁해 나가고자 먼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의논이 되어 천하에 선망이 떨치도록 하고, 서로 이 시기에 호응하여 서둘러 그 방법을 꾀하기로 이미 결정을 보아 드디어 일할 인물을 암암리에 찾아 〈선언서〉에 서명키로 뜻을 모았다.

이 때 육당 최남선이 〈선언서〉 글을 쓰게 하고, 아울러 이를 널리 전파하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만반의 대책을 세웠다. 공은 해외에 파견되어 동지들을 규합하며 나라 안팎이 이에 호응하도록 주선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민족대표 33인에 서명하지 아니하고 이러한 거사를 맡게 되었다.

공은 이러한 해외 활동의 사명을 받들어 만주를 거쳐 북경과 상해 등지를 떠돌며 활동하기 수개월 만에 다시 고국에 돌아왔는데 그 날이 바로 3월 3일이었다. 온 국민이 지역마다 벌떼같이 일어나 독립만세 운동이 쉴 줄 모름에 일제는 간담이 서늘하여 놀람을 금치 못한 나머지 강경한 탄압책을 써서 의로운 민중과 지사들을 무참히 투옥하며 그 만행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해공 신익희 동상. 서울시 강동구의 강동역 근처에서 찍은 사진.
 해공 신익희 동상. 서울시 강동구의 강동역 근처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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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촌부로 가장하고 다시 상해에 이르러 국외 망명독립운동지사들과 만나 임시정부를 창립하고 만방에 이를 널리 알림과 동시에 빠리강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민족자결의 길을 촉구하게 했다. 

공은 내무총장 대리, 외무총장 대리, 그리고 국무원 비서장 등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피를 홀림이 아낌 없어야 대업을 성취할 수 있다. 일본이 이미 한국을 강탈하였는데 이제 중화민국의 정세 또한 입술이 망해 이가 추위에 떨기로는 그 아픔과 우려됨이 서로 같은 관계에 있다. 중국과 더불어 군사력 등 힘을 모으지 않고는 실효를 거두기가 어렵다."

공은 이러한 주장을 관철하고자 중원 남북을 떠돌면서 중국의 혁명가 여러 인사들을 찾아가 그 방책을 설득하던 차 마침내 동경유학 시절 학우 호경익 장군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중국 국민당 제2군 장성이었다. 한ㆍ중 합작의 도움을 얻어 그 군벌의 육군중장에 임명된 공은 한ㆍ중 청년들을 정선하여 분용대를 편성하여 강훈련을 하던 중 대업 추진에 앞서 호경익이 갑자기 병사함에 이 계획은 종내 수포로 돌아갔다. 

1931년 9월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할 획책을 꾸몄다. 공은 상해임시정부로 돌아와 내무부장에 다시 취임하였는데 이 때 일본군은 이미 만주를 점거하고 이듬해 상해에 육박해왔다. 37년 가을 다시 북경을 침략하여 중ㆍ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계속)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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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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