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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 벽에 걸려 있는 범죄 없는 마을 표창장
 마을회관 벽에 걸려 있는 범죄 없는 마을 표창장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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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빠가꼬 이장 자리 절대 몬 내놓겠다, 요 말입니다."
"아니, 저번에 우리랑 얘기할 때는 내놓는다면서?"


반장의 눈길을 피해 마을회관 벽에 걸린 '범죄 없는 마을' 표창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박 이장이 곧 범죄라도 일으킬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가면서, 마을회의 분위기는 갑자기 살벌해졌다.

"그때는 기분이 괜찮았꼬, 그날 이후로 기분이 계속 나빴다 아입니까."
"뭐가 기분이 나쁘다는 건데?"

"내가 그때 형님 얘기 듣고 나서, 암행어사매로 마을 분들 의견을 한번 조용하이 염탐을 해봤다 아입니까. 그란데 내가 계속 이장을 했뿌믄 좋겠다, 카는 분들이 엄청 많더라꼬요."

"누가 그러던데? 이미 의견 수렴을 마치고 박 이장한테 얘길 한 건데."
"누가 그 캤는지는 뭐 갈차줄 수는 엄꼬! 아이, 씨··· 우쨌거나 내는 이장 좀 더 해야겠다꼬!"


셋이나 모인 물밑 접촉 자리

마을회의에서 이장 교체를 놓고 한바탕 난리가 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이장 교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려고 작업반장은 자신의 집으로 박 이장을 불렀다. 식탁 위에는 소주와 곶감, 군고구마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 남편과 박 영감도 함께였다. 조심스러운 물밑 접촉에 셋이나 모인 건, 마을 전체의 뜻이라는 걸 박 이장에게 보여주기 위한 세팅이었다.

"이장 오기 전에 우리 위원장한테 한마디만 하겠네, 자네는 야망이 너무 커!"
"네? 야망요? 세상살이 등지고 귀농한 제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반장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남편은 박 이장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반장은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며 남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처음엔 남편도 도끼눈을 하고 반장을 노려보다가 점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남편의 나빠진 기분이 토끼 눈으로 변한 건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지 싶다. 박 영감이 반장의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여(기)는 자네가 내무부 장관을 했다 캐도, 여 사람이 아이까네 이장질 몬 한다꼬. 위원장 자네 혈통과 신분 가꼬는 새마을 지도자까지 가는 게 끝이라고 보믄 된다꼬."

박 영감의 얘기를 듣고 남편으로선 화가 날 법도 했다. 새마을 지도자를 하라고 부추길 때만 해도 다들 곧 남편을 이장으로 옹립할 것처럼 약속했는데, 넌 성골이 아니라 육두품이니 헛물켜지 말라고 선언한 셈이었다. 하지만 남편도 그렇게 만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제가 언제 이장 자리 탐난다고 한 적 있습니까? 새마을 지도자가 이장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라고 말한 건 동네 어르신들입니다."
"자네, 우리 이사장을 이장으로 만드는 데 동의하는가? 사랑과 야망 중에 하나만 선택하게나!"


반장의 말에 남편은 한참이나 침묵했다고 한다. 그 고요의 순간이 결국 남편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소용돌이의 존재를 증명한 꼴이었다. 남편은 이런 대화들을 내게 전혀 말하지 않았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건 반장을 통해서였다. 반장은 혀를 끌끌 차며 내게 이렇게 전했다.

"사랑과 야망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니까, 아 글쎄 참!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런 게 아니더라고. 저는 뭐 야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이게 뭐냐고, 쯧쯧."

중장비업자인 박 이장이 반장의 집에 도착한 건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난 뒤였다. 거실에 들어선 이장은 미간부터 살짝 찌푸렸다. 조명이 꺼진 무대 같은 황량한 술판 풍경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빈 소주병들과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고구마 껍질, 식어 빠진 동태탕. 그리고 시뻘건 얼굴 세 개.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보는 느낌이었으리라. 분주히 돌아가던 술잔도, 이젠 다 멈춘 채 식탁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박 이장 같은 술꾼은 이 시추에이션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후래삼배(後來三杯) 뒤, 전력을 다해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부어도 결국 그들만의 세계관에서 사는 허깨비들과 계속해서 대작해야 한다. 술자리에 늦은 자는 앞선 자들이 술로 빚어 정성껏 구축한 세계에 결코 온전히 동참할 수 없는 법이다. 부분적 참여는 가능하나,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박 이장도 분명 그렇게 느꼈기에, 처음부터 짜증이 약간 섞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장 자리 그거 이제 팍 내리놔뿌라

"형님, 안 캐도 바쁜데 뭐 땜에 날 불렀소?"
"아이고, 우리 박 이장! 항시 수고가 많네. 이번에 우리 연구회가 예비 마을기업에 선정되고, 또 지금 협동조합도 만들고 있는 거는 들었는가 모르겠네?"


이장은 일부러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식어 빠진 술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신호를 반장에게 보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아, 그거. 듣기는 들었는데, 내가 바빠가꼬 신경도 몬 쓰고. 내가 이장으로서 뭐 도와드릴 거는 엄꼬요?"
"하나 있기는 한데···. 아무튼 사업하랴 이장하랴 많이 힘들지, 박 이장?"
"말해 뭐합니까, 형님. 사업을 그만둘 수는 엄꼬. 너무 힘들어가꼬, 누구 이장 할 사람 있으믄 빨리 내리놔뿌야지요."


박 이장은 빨리 이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주민들에게 6년째 늘 입버릇처럼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다. 출자금 관련 임시 총회에서 자신의 말버릇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반장은 그 경험에서 뭔가를 배운 듯했다.

"그래, 박 이장, 이장 자리 그거 이제 팍 내리놔뿌라. 아까 뭐 도울 거 없냐고 물었는데, 그 힘겨운 이장 자리 이번 기회에 확 내리놔뿌믄 된다. 그게 협동조합, 마을기업, 우리 동네를 돕는 거다. 생각 잘했다."

그 순간 박 이장은 입이 쩍 벌어지면서 턱부터 식탁 위에다 내려놓았고, 반장과 남편, 박 영감은 술김에 박수까지 쳤다고 한다. 태생적 한계로 인해 죽었다 깨어나도 이장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걸 통보받은 남편은, 마음의 상처를 잔인한 공격성으로 바꿔버렸다.

"하하하! 박 이장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소원성취하셨네요. 이제 자유롭게 마음껏 중장비 사업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함양을 벗어나 대한민국 나아가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호호호!"

내가 만약 박 이장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비아냥대는 남편의 턱주가리를 한 방 갈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두부(頭部) 손상이 너무 심했는지, 박 이장은 환경의 자극에 의식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자발적인 신경 활동이 없어지는 혼수상태에 5분간 빠져 있었다. 그러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 말고 이 동네에서 이장 할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다꼬!"
"동네 사람들 모두 우리 이사장, 아니 현재 노인회 총무를 이장으로 추천했네."

"일영이요? 나, 참. 여자가 무신 이장을 한다꼬. 이장은 뭐 아무나 하는 긴 줄 압니까? 동네 사람들이 뭘 몰라가꼬 이카는데, 여자가 이장이랍시고 이장 회의 가봤자 개무시나 당한다꼬요. 허, 참. 일영이 가가 뭘 안다꼬."


박 이장이 입버릇처럼 반복하던, 이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반어적 표현이었다. 사실 그걸 모르는 주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이 양반이! 듣자 듣자 하니까, 뭐라고? 우리 와이프가 뭐 어쨌다고? 우리 일영이는 여기 이 마을 출신이라서 내무부 장관도 할 수 있는 대단한 여자라는 걸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네, 이 양반이!"

박 이장의 멱살을 움켜쥔 남편의 두 손을 반장이 꼬인 매듭을 풀 듯이 펼쳐서 간신히 원위치로 갖다 놓았다. 멱살에서 풀려난 남편의 오른손은 곧바로 소주병을 잡았고 왼손은 잔을 쥔 채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음천마을 작업반장의 집
 음천마을 작업반장의 집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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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박 이장. 이건 자네에 대한 문책성 인사 조치가 아니라, 동네에 새로운 경제적 활력을 만들기 위한 혁신 인사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네. 이미 주민들 모두 뜻을 모았으니, 맘 크게 먹고 대승적 차원에서 결단하는 게 어떨까 싶네."

반장의 말에 이장이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남편과 반장, 박 영감은 소주 각 일병씩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고 한다.

"일단은 기분이 좀 나쁘네요, 형님. 우쨌든 제가 1년만 더 이장 하면 안 될까요? 제가 우리 마을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있어가꼬···."
"6년 동안 아무꺼또 안 해뿌다가 인자 와가꼬? 마을에 머 할 낀지,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꼬. 머 할 낀데? 내 쌀이라도 팔아줄 끼가?"


박 이장 때문에 농협에 쌀을 팔아야 할 시기를 두 번이나 놓쳐 경제적 피해를 입은 박 영감이 가소롭다는 듯 빈정거렸다. 박 영감의 반응에 이장은 시무룩해져서 입을 닫았다. 이장을 지켜보던 반장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 이사장이 이장을 하고, 협동조합과 마을기업이 좀 자리를 잡으면 이삼 년 뒤에 박 이장이 다시 이장을 하면 되잖아, 어떤가?"
"머 그렇게 된다면야."

"그 대신 이런 내용은 주민들에게는 무조건 비밀로 하고. 그래, 이젠 기분이 좀 괜찮은가, 이장?"
"네, 형님. 제가 머 기분 나쁠 이유도 없다꼬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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