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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룡님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증손이다. 원로시인이며 종합문예지 한맥문학의 편집인으로 86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특히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
▲ 직접 쓴 글 옆에서 여해룡 선생 여해룡님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증손이다. 원로시인이며 종합문예지 한맥문학의 편집인으로 86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특히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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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셀프가 뭐꼬?"

오랜만에 나간 협동조합 매장에서 지인들과 저녁을 먹다가 손님들이 물은 어디에 있느냐고 컵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다 못해 정수기 옆에 붙이려고 굵은 펜으로 쓰고 있는데 한 칸 건너편에서 꼬장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물은 직접 가져다 마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걸 몰라 묻나? 좋은 우리말 두고 먼다고 셀프라는 말을 쓰나 그 말이라."


하기야 원로시인이자 인사동 터줏대감인 선생님이 그걸 몰라서 물었을 리 없는데 나 또한 그다음 진도를 몰라 멀뚱거렸다. 일단 물은 셀프까지는 썼으니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되겠기에 일어서려는데 선생님이 당신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신다.

"가서 좀 큰 종이를 가져와라. 눈에 잘 띄게 하나 써줄게."

달력 종이를 하나 북 뜯어다 드렸다. 가방에서 굵은 붓 펜을 꺼낸 선생님은 그야말로 이런저런 재단도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인사동의 전통 찻집에 선생님이 직접 쓰시고 코팅까지 해서 붙여 놓았다. 만약 저 자리에 물은 셀프라는 글귀가 붙었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훨씬 더 어색할 것 같았다.
▲ 전통 찻집 인사동의 전통 찻집에 선생님이 직접 쓰시고 코팅까지 해서 붙여 놓았다. 만약 저 자리에 물은 셀프라는 글귀가 붙었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훨씬 더 어색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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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손수 가져다 드십시오."


참으로 어색했다. '손수'라는 딱 두 글자로 대체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긴 하다. 하기야 정수기 옆에 물이라는 한 글자만 써 붙여도 갖다 먹으라는 암묵적 소통은 되는데, 한 문장으로 '갖다 드십시오' 하니 뭔가 어색한 그림 같았다. 그래도 어르신의 좋은 뜻이니 받들어 붙이고는 멀찌감치서 한 번을 더 보니 그럴듯하긴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뜻밖에 괜찮았다. 그것으로 대화의 주제도 삼더니 이어서 옛날 '써클'이라는 확고한 뜻의 영어가 '동아리'라는 더 확고하고도 좋은 뜻의 우리말로 바뀌고, 그 바꿈을 주도한 사람이 얼마 전 작고하신 백기완 선생님이라는 대화로까지 이어졌다.

며칠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은 한글과 한글학회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 지금도 '물은 셀프'라고 써 있는 식당에 가면 그것을 고쳐 써 보려고 애를 쓴다는 말을 들으니 아무 생각 없이 타성에 젖어서 했던 내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따라나서 봐라."
 
 
선생님을 따라 인사동의 냉면집과 전통찻집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영어와 병기했다는 주인의 설명이 있었다.
▲ 인사동 냉면집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영어와 병기했다는 주인의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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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다 내가 사장들 설득해서 고쳐 붙인 거라. '물은 셀프'보다 훨씬 낫지 않겠나? 근데 내가 지금 나이가 86인데 언제까지 이걸 할 수 있겠나? 인자는 늙은이라고 뭔 말을 해도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그러니 젊은 너희가 좀 열심히 해라. 딴 데는 온통 영어가 지배한다 해도 여기는 전통의 인사동인데 물은 셀프가 뭐꼬?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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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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