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야코동은 계란과 닭고기를 함께 요리한 음식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부모자식 덮밥'이 된다.
▲ 오야코동(왼쪽) 오야코동은 계란과 닭고기를 함께 요리한 음식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부모자식 덮밥"이 된다.
ⓒ 박광홍

관련사진보기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스시나 타코야끼 등과 함께 오야코동(親子丼)을 적어도 열 손가락 반열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간장을 바탕으로 밥 위에 계란, 닭고기, 양파 등이 어우러진 오야코동은 일본에서 아주 대중적인 음식이다. 고급 식당의 것부터, 슈퍼 매대에 비치된 저렴한 도시락에 이르기까지, 오야코동은 다양한 형태로 일본인들의 한끼를 책임지고 있다. 일본과의 왕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2010년대 이후로는 한국에서도 결코 낯선 음식이 아니다.

오야코동이 오늘날에 이르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으로 회자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오야코동조차도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를 피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 대중 음식에 서려 있는 어두운 그림자 

1905년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서구 열강을 상대로 승전한 데에 이어(러일전쟁), 1910년에는 조선을 병탄하며 식민지를 확보했다. 일본은 분명 표면상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발흥한 제국의 내부에는 수많은 모순과 갈등들이 잉태되며 균열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부터 러일전쟁 승전에 이르는 기간동안 위기를 극복하고 '탈아입구'를 완성시켰던 제국의 지도층들은 이제 스스로의 특권을 공고히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한편, 군과 재계에서 출세의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대외전쟁을 그 수단으로 삼았다. 사회 내부의 계급모순이 격화돼 가는 가운데 전란마저 계속되면서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의 지도부로부터 위험시되던 '불온사상'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여기에 더해 1918년에는 굶주리다 못한 민중들이 쏟아져 나와 국가와 재벌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던 '쌀 소동'이 있었다. 제국의 지도부는 천정부지로 솟던 쌀값을 제어하는 데 실패했지만, 쌀값 폭등을 초래한 시베리아 출병을 재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민중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결국 항쟁하던 수십명의 시민들이 군경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으로 사태는 막을 내렸다(관련 기사: 정부와 싸우던 일본인은 어떻게 '황국신민'이 됐나).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3.1운동과 그 진압은, 내부에서 폭발하던 모순을 제국의 지도부가 폭력으로 억눌렀던 추태의 절정이었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이같은 유혈낭자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막부가 무너진 이후, 메이지 유신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근대적인 교육 체계를 수립하는 데 열을 올렸다. 신분질서 너머로 주어진 새로운 기회 아래서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을 거쳤고, 그중 소수가 관립고등학교나 제국대학의 교문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제국 일본의 차세대 지도자였고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단결했다. 이런 학생들에게 있어, 제국의 국방과 질서를 수호하는 '신성한' 군대와 경찰이 '사악한 권신과 재벌'을 위해 자국민을 살해하는 사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묵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변혁에 목말랐던 이들이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개조론과 같은 새로운 사상들에 눈을 뜬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변화에 목말랐던 이들, 사상에 눈을 뜨다
 
아래 최우측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도쿄제국대 교수는 민주주의적/의회주의적 주장을 펼쳐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 시국강연회 주요 인물들의 기념사진(1918년 11월 24일) 아래 최우측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도쿄제국대 교수는 민주주의적/의회주의적 주장을 펼쳐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불온사상'을 유포하는 교수나 재야 지식인들에게 협박과 테러를 일삼던 극우단체들조차, 학생들의 성원으로 달아오른 연설회에서는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자신감을 얻은 학생들은 개별적인 집회 참가를 넘어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918년 12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동대신인회'(東大新人会)는 아주 도전적인 두 개의 강령을 세상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세계의 문화적 대세인 인간해방에 협조하고 그것을 촉진하는 데 노력한다.
2. 우리는 현대 일본의 합리적 개혁운동에 종사한다.


특권층의 철밥통인 '귀족원'의 폐지, 군부 폭주를 정당화하는 '통수권'의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기존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넘어, 학생들은 더욱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행동했다. 천황제 폐지나 식민지 해방(혹은 자치권 인정)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들 사이에 신봉되던 이론은 엇갈렸지만, 일본을 뿌리부터 변혁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만큼은 일치했다. 이 '운동권' 학생들은 차차 성장하여 학계와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 '붉은 역병'이 점차 확산되는 모양새를 국가적 위기로 판단했다. 결국 1925년에 '치안유지법'이 제정됐다. 이 시점부터 국가는 '공식적'으로 위험사상을 탄압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사상 문제를 전문적으로 단속하는 특별고등경찰의 감시는 사회 전반에 미쳤다. 천황제를 부정하는 아카(빨갱이), 국민도덕을 흐트러뜨리는 서구의 오염된 철학, 식민지 독립 운동 등, 사상과 관계된 광범위한 현안들에 특별고등경찰의 칼날이 향했다.
 
특별고등경찰은 사상범을 단속하던 경찰 기구였다. 제국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국 군정에 의한 "인권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 검열 업무를 수행하는 특별고등경찰 특별고등경찰은 사상범을 단속하던 경찰 기구였다. 제국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국 군정에 의한 "인권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특별고등경찰이 단순한 의심만으로 현장에서 일반 시민을 구타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특히 당시의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로 다가갔던 것은, 특별고등경찰에게 연행돼 받게 될 끔찍한 고문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불온사상'을 박멸할 수 있을지 궁리했고, 차차 노하우가 쌓이면서 투옥과 고문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야코동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상범 다루는 데 활용되던 음식

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도쿄대 교수가 1982년에 펴낸 <전시기일본의 정신사>(戦時期日本の精神史)에는 사상탄압과 오야코동에 얽힌 이야기가 자세히 기술돼 있다. 치안유지법의 입안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케다 카츠(池田克) 검사는 사상범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교본까지 만들어냈는데, 오야코동은 이 전향 교본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도구였다.

이케다 검사가 논하는 오야코동 활용법은 간단하다. 경찰서장은 억류된 장소로부터 사상범을 불러다가 집무실의 서장 자리에 편하게 앉힌다. 이후 서장 자신의 자켓에서 직접 돈을 꺼내다가 외부 음식점의 오야코동을 주문하고 그것을 사상범에게 먹인다. 고문과 병행되는 유화책은, 식민통치기와 군부 독재를 겪었던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왜 하필 그 도구로 오야코동이 제시되는 것일까. '오야코동'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부모자식덮밥'이 된다. '계란'과 '닭고기', 즉 부모와 자식이 음식의 주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 '부모자식덮밥'을 먹이며 사상범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부모와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 전향 매뉴얼의 의도였다.

매뉴얼에서는 사상범이 오야코동을 먹을 동안 정치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권위에 반감을 가진 학생들에게는 역효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서도 논하지 말라고 한다. 매뉴얼이 경찰서장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문장이다.

"자네의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실 텐데..."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이 소원한 바와 같이,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상범들의 기세는 크게 꺾이게 된다. 1933년 6월 10일에는 옥중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천황제 폐지', '식민지를 비롯한 모든 민족의 자치', '만주사변을 비롯한 일본의 침략 정책 반대' 등을 골자로 하던 기존의 주장들을 철회하는 전향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3년 간 사상범들 중 74%가 전향했고, 26%만이 기존의 신념을 지켰다. 

츠루미 교수는 상기의 전향 통계와 더불어, 1943년 정부발표를 인용해 '전향 이유'를 소개한다. 여기에 따르면, '가정관계'로 전향을 선택한 사상범은 전체의 26.92%에 달한다. 이는 물리적 폭력이 전향을 이끌어낸 요인임을 나타내는 '구금에 의한 후회' 14.41%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물론, 만주사변 이후의 국가주의 광풍을 비롯해 사상범들이 전향하게 된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 대목에서 가족애를 자극해 전향을 추진했던 사상탄압 방식이 크게 유효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별고등경찰은 폭력적으로 국민을 탄압하여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패전 이후 전원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냉전이 격화되고 반공질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경찰과 공안조직으로 복귀하였다.
▲ 노동절 시위 참가자의 신체를 수색하는 특별고등경찰(1928년 도쿄) 특별고등경찰은 폭력적으로 국민을 탄압하여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패전 이후 전원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냉전이 격화되고 반공질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경찰과 공안조직으로 복귀하였다.
ⓒ 아사히신문

관련사진보기

 
이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향'은 학생층 사이에 널리 쓰이는 유행어가 됐다.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아닌 복종하는 '신민'만이 남겨진 사회의 말로는 참담했다. 군부는 스스로의 출세와 보신을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전란의 수렁으로 끌고 갔지만, 누구도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제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벌였다는 '사상 탄압'이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파멸에 일조한 셈이다.

한편, 치안유지법과 오야코동 전향 매뉴얼을 만들어낸 이케다 카츠 검사는 패전 직후였던 1946년 8월, 그동안의 사상 탄압 경력이 문제시돼 공직에서 추방됐다. 그러나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고 반공 질서가 새로 수립되면서, 이케다 검사를 비롯해 사상 탄압 문제로 쫓겨났던 검경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52년에 복권된 그는 2년 뒤 최고재판소 판사의 지위에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사상 탄압의 어두운 역사는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청산되지 못한 것이다.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