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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회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일터와 삶터를 살아가며 평등과 존중에 대해 고민하는 수많은 후원회원, 지지자들과 함께 길을 만들어왔습니다. 오는 10월 13일 후원의 밤을 맞이하여, 여성노동자회는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왔고, 연결되기 위해 노력해왔는지를 풀어내고자 합니다. 여성노동자회는 더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꿈꿉니다. [편집자말]
1989년 일하는 여성의 권익향상을 위하여 창립한 인천여성노동자회. 그곳엔 25년을 함께한 소모임이 있다. 20대에 만나 40대, 50대가 되기까지, 여성노동자로 만나 결혼, 출산, 육아의 경험을 함께하며 여성운동활동가가 되기까지. 그들의 역사는 여성노동자의 역사였고, 이 땅의 여성의 역사였다. 그 시절 함께하는 걸음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 '생존'해 있다.

[여성사랑 멤버들]

향옥
여성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은, 가족도, 결혼도 아니었다. 삶 속의 부당함을 공부를 통해 다시 바라보며, 지금은 교육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명숙
불평등하고 불합리만 가족구조속에서 일찍 가부장제의 부당함을 알았지만 여성노동자회를 알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아나가야할지 몰랐다. 지금은 성평동노동을 위한 여성노동 활동가가 되어있다.

성아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건 노동자의 잘못인줄 알았다. 여성노동자회를 알고 사회구조속에서 불합리만 현실을 보며 활동가로 성장, 지금은 자활에서 장애인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정임
K장녀로 살았고, 가족 내 불평등한 관계를 보면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봉제와 전자 업종에서 여성 노동자로 살았지만,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취업이 힘들어졌다. 여성노동자회를 만나서 활동가로 성장, 지금은 일하는여성아카데미에서 교육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성사랑 소모임 멤버들의 모습
 여성사랑 소모임 멤버들의 모습
ⓒ 여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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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의 역사를 지닌 소모임이라니, 그 시간이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은 어땠을까가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여러분들은 여성노동자회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나요?
향옥 : "제가 처음 여성노동자회를 알게 됐을 때는 여노에서 한참 성·연애·결혼 강좌랑 여러 소모임를 하는 중이었어요. 그래서 강좌를 듣고 나서 소모임을 하게 되었죠. 그때는 그냥 강의를 들으러 온 거였기 때문에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회원 가입은 부담스러워서 미루고 미뤘던 기억이 나요. 근데 그 후 공부를 하다가 회원이 되었어요."

명숙 : "제가 기억이 그러니까... 96년에 애 낳고 그 애가 잘못됐어요. 그래서 많이 우울했고, 뭐라도 해야 해서 잠깐 취업도 해봤지만 힘들었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다시 집에 있게 되었는데,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답답하고, 내가 너무 한심하고... 혼자 견디기 힘들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심심했죠. 외롭고.

그래서 잘 아는 선배에게 우울하다고는 못하고 '나 너무 심심하다.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했죠. 당시에 지역에 다른 여성 단체는 모르고 인천여성노동자회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여노 회원이 되고 싶다' 했더니 선배가 소개시켜 줬어요. 그렇게 여노 회원이 되었어요."

성아 : "저는 93년 후반에서 94년 초에, 부산에 있다가 인천으로 왔어요. 오빠 따라 인천을 왔는데 미싱 공장을 들어갔는데, 미싱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미싱부터 배워야 했어요. 그 때 부평 청산골을 알게 돼서 거기서 미싱을 배우다가, 지점토 만드는 소모임을 알게 되었죠. 거기 구경하다가 포섭됐어요!(웃음) 계속 소모임도 하고 하면서요."

정임 : 항상 11월 13일이면 전태일 열사 추모 겸 해서 노동자 대회를 했는데요. 당시 저는 인천에서 해고자 모임을 하던 중이라 해고자 모임 깃발을 들고 참여했어요. 그래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휙 하고 노란색 전단지가 날아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전단지를 보니까 인천이에요.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서 들여다봤더니 인천여성노동자회고, 주소를 보니까 우리 집에서 가까워요. 근데 거기에서 미싱을 가르쳐준다는 거에요.

그때 봉제 회사에서도 해고되고, 전자회사에서도 해고됐었는데, 해고되니까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서 봉제회사에 취직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전자 업종으로 바꿔서 취직을 했는데 또 1년 만에 해고 당하고 나니... 현장 운동에 대한 욕구가 있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미싱을 배워야 되는데 어떻게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거기서 미싱을 가르쳐 준다잖아.

그리고 당시에 제 머릿속에 여성의 문제와 노동의 문제, 이 두 가지가 항상 있었는데, 노동자와 여성을 이렇게 나란히 사용하는 단체가 있다니 '이건 나를 위한 단체야!'싶어서 너무 반가웠어요! 그래서 바로 그 전단지를 들고 찾아갔죠!"
 
집회에 참여하여 밝게 웃고 계신 향옥 님의 모습
 집회에 참여하여 밝게 웃고 계신 향옥 님의 모습
ⓒ 여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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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다양한 계기로 인천여노를 알게 되셨군요!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게, 당시 인천여성노동자회에는 다양한 모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여성사랑 모임을 시작하게 되신 걸까요?
명숙 : "여러 모임이 있었지만 딱히 들어갈 모임이 없었어요. 나와 맞는 모임을 찾고 싶었죠. 그래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을 하자 했던 거죠.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어요.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노동자들이 모여서 여성주의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 마음은 같았던 거 같아요."

향옥 : "'우리끼리 이렇게 한번 해보자'고 한 게 아니라, 다들 여기저기 모임에 들어갔는데 남아있던 사람들이 '우리끼리도 뭔가 소모임을 하나 만들어야 되는데. 뭘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당시엔 거의 미혼이었고(한 명 빼고는), 그래서 모임을 시작하게 된 거 같아요."

- 시작은 다소 얼떨결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요.(웃음)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진 여성사랑 모임이 지금은 25년이나 되었어요. 이걸 가능하게 한 여성사랑 모임만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정임 : "공감대가 이어져가면서 서로의 상황에 맞는 주제가 나왔던 거 같아요. 이게 여성사랑 모임만의 특징일 수도 있을 듯해요. 다행히도 우연히 같은 시기에 결혼과 출산을 같이 하면서 고민의 정도가 거의 유사했지요. 그리고 시사적인 거나 사회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구요.

그리고 자기 일상의 어려움이나 이런 것들을 함께 나누고 해결해 가면서, 우리는 공감대가 많았던 거 같아요. 우울하기도 했고. 정보도 많이 공유하고, 스트레스도 나누고 해소한 부분이 있지요."

성아 : "그 시대적인 상황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요즘에는 남의 집 가서 같이 어울리고 노는 거가 일상이 아니잖아요. 아이도 있고 미안하기도 하고 시대적인 상황도 있고요. 그때는 뭐든지 함께 하는 거야. 그래서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즐겁고 재미났었는데."

향옥 : "그게 이번 주에는 우리 집이야, 다음 주에는 너네 집이야, 이렇게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임을 하는 게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런 좀 연대감이 있었던 거 같아요. 또 우리끼리만 하는 모임이 아니라, 우리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런 모임이었던거죠."
 
현재까지 이어져 온 여성사랑 멤버들의 인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여성사랑 멤버들의 인연
ⓒ 여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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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대라고 하니까 여러분의 당시 고민들이 궁금해져요. 조금 힘든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고민,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어려웠던 부분들을 같이 나누어주실 수 있을까요?
향옥 : "애들 아빠가 많이 아팠어요. '이 사람이 없으면 내가 아이하고 무엇을 해서 먹고 살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언젠가 '이 사람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으니까. 그러면 내가 '평생 벌어 먹고 살 일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했었죠. 그러면서 '애들 아빠가 돈을 벌 수 있을 때 공부를 해보자, 내가 공부를 해서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려야겠다' 생각해서 공부를 시작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예민해지고 힘들어지고 한계점에 온 적이 있었어요. '나는 너랑 도저히 못 산다', '애는 니가 키워라. 니 애니까' 한 적도 있었죠. 그러니까 남편이 애를 또 껴안았거든요. 애를 껴안으면 내가 못 나갈 줄 알았대요. 근데 애가 안 보였어요. 그리고 안 키우고 싶었어요. 그리고 벌어 먹고 살아야 되는데 애를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해. 나는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여기서 안 살면 내가 어디 가서든 혼자 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짐 싸 갖고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한 1년 싸우고 나니까 이제 조금 나아지더라구요. 모든 걸 놓고 치열하게 싸웠더니."

성아 :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못 했어. 애들 때문에... 내가 무너지면 애들이 다 무너진다고 생각했지요. 그거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애들 고등학교 때 한 번 법원에 가서 이혼판결을 다 받았는데 아이가~ '제발~'하면서 울어가지고 신고를 못 했어요. 이제는 애들이 막상 다 크고 나니까 지금은 뭐 어떻게 하든 내가 애들을 키우면 되니까 괜찮지만... 그리고 이제 자활에 들어와서 경제적인 생활도 할 수 있고요.

내가 이혼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정말 같이 살다가 죽일까 봐, 그래서 이혼했는데... 아픈 상처이긴 해요, 아픈 상처이긴 한데 그래도 생각보다 편하고 좋아요. 같이 공부하면서, 이제는 상담활동가로 지내고 있고, 도움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나도 도움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정임 : "13층 베란다에서 항상 이불을 털었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에 이렇게 이불처럼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13층에서요. '밑에 내려가면 시원해지겠구나.' 막 이런 유혹에 계속 시달렸거든요. 그래서 이불을 털 수가 없는 거예요. 

또 아래층 위층 엄마들이랑 모임도 했는데 '언니 나 같으면 언니처럼 일 못할 것 같아. 언니처럼 애들 못 키울 것 같아. 우리 애 아빠 칼퇴근 해도 힘든데.'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되게 안쓰럽게 봤어요. 근데 자존심은 있어서, 굉장히 힘을 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외롭게 혼자 육아를 한 느낌... 그게 참 힘들었어요."

- 외로움이 참 힘들었다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여성 사랑이 힘이 되었을까요?
정임 : "아무래도 여성사랑 덕분에 외로움을 이겨내지 않았을까요? 외로움 뿐 아니라... 독박 육아에 대한 고단함이라든가, 그런 걸 학습도 하면서 지금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줬던 것 같아요. 굉장히 답답하고 힘들었던 것을 여기에서 해소하고 그랬던 게 많았어요."

명숙 :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도 있고, 성장도 했죠. 함께 책도 보고 와서 공부하니까. 그리고 그때 유기농 음식에 대해서나, 아이들한테 생식 얘기도 하고, 인문학 공부도 하고, 다양한 것들에 대해서 다뤘던 것 같아요."

향옥 : "지금도 생각나는 게, 그때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가 결혼과 동시에 다 퇴사를 했었고, 그래서 서로 그 얘기를 많이 하면서 풀어냈지요."

정임 : "소위 말하는 'K-장녀'로 살았고 부모님의 불평등한 관계를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왜 이런 관계가 형성됐지?' 하는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다들 공통된 어떤 문제 의식을 좀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사랑해야 된다'는 생각, '항상 자기를 희생했던, 배려만 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으로 살자'는 생각이 있었죠."

성아 : "결혼 전에는 직장에서 굉장히 당당했거든요. 결혼 후에는 당당하지는 못했어요. 애를 낳으면서... 나한테 딸린 식구가 생기니까 부당해도 말을 못하더라고요. 나 혼자는 가난해도 상관없는데 자녀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일만 하고 있더라고. 눈물만 흘리고... 그게 참 힘들었어요.

여노를 몰랐을 때는 근로기준법 이런 것도 몰랐어요. 부당 대우를 받는 것도 그 사람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알고 나서는 항상 내 뒤에 여노가 있었고, 든든했어요."
 
힘든 시절을 함께 의지하며 버텨낸 여성사랑 멤버들
 힘든 시절을 함께 의지하며 버텨낸 여성사랑 멤버들
ⓒ 여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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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그 시절 여성사랑은 유일하게 내 손을 잡아준 내 편이었지요. 가부장의 횡포에 속절없이 무너질 뻔 했던 아픈 시절이었어요. 내 인생의 기적 같은 인연... '여성사랑' 고맙습니다. '인천여성노동자회'는 그 속에서 견뎌낸 힘이죠.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얘기하며 추억에 젖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하는 시간이었어요. 그 때 거기, 지금 이곳, '인천여성노동자회', 저희들에겐 참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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