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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도시를 이루는 핵심 요소는 '축(軸)'이다. 도시 활동과 흐름을 결정짓는 가로망도, 휴식·휴게기능의 공원과 녹지도 모두 축 개념에 녹아들어 있다. 한양 도시 축은 육조거리와 운종가, 광교∼숭례문을 잇는 가로가 대표적이다. 그 다음이 용도에 따른 '토지이용 배분'이다. 용도별로 배분된 토지이용을 결정짓는 요소는 개개 혹은 군(群)을 이룬 건축물의 기능이다.

한 덩어리(一團)의 공간을 분할하는 권위적이고 상징적인 건축 군도, 축으로 배치되는 경향성을 띤다. 넓은 직선 가로가 권위와 권력을 상징하듯, 직선의 축 선에 들어서는 건축 군도 마찬가지로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궁궐과 사찰에서 이런 축 개념 건축을 흔히 볼 수 있다.
 
덕수궁 영역을 표시한 안내판. 하늘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사라지고 없는 궁궐영역. 남은 건축물의 축선이 명확하다. 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부터 시청앞 광장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었다.
▲ 덕수궁 영역 덕수궁 영역을 표시한 안내판. 하늘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사라지고 없는 궁궐영역. 남은 건축물의 축선이 명확하다. 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부터 시청앞 광장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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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조영은 임금이 남면(南面)함으로써 권위와 권력을 확보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축으로 조영된 경복궁 전각 배치가 대표적이다. 남면의 원점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으론 문(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을 북으로는 전각(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을 세웠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이다. 물론 지형과 공간제약에 따라 예외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덕수궁(경운궁)이 여기에 해당한다.

덕수궁의 탄생과 변화

덕수궁은 순전히 일본 때문에 생겨난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사라지자, 선조가 중층 석어당(昔御堂)을 임시거처(時御所)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탈바꿈한다. 이때 즉조당(卽阼堂)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석어당은 월산대군 소유였다. 이 집이 단청 없는 민가(民家)로 남은 이유는, 고난을 겪어낸 당시를 잊지 않기 위해 당초 모습을 바꾸지 않고 지켜온 때문으로 보인다.

아관으로 파천한 고종은 이 궁을 정궁으로 삼는다. 광해군이 계모를 이곳에 유폐시킨 후 280년 만이다. 몇 차례 중창을 거치며 궁역은 넓어졌으나, 지금은 중화전 일곽만 남았다. 사라진 선원전 일곽과 돈덕전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덕수궁 전각 축선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중화전 뒤 즉조당이 궁궐 축을 결정하는 중심건축물이다.
▲ 덕수궁 덕수궁 전각 축선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중화전 뒤 즉조당이 궁궐 축을 결정하는 중심건축물이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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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축선은 즉조당에서 비롯되었다. 남남서 축의 즉조당이 덕수궁을 배태(胚胎)시킨 핵심 건축물이다. 남북 축으론 중화전과 중화문을, 동서 축으론 나머지 전각의 축과 좌향(坐向)을 결정지은 기준점이다. 정남향인 양관(洋館) 석조전과 정관헌은 이 축선에서 벗어나 있다.

궁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따르지 못했다. 이는 도시화가 진행된 곳에서 뒤늦게 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또한 각국 공사관에 의해 터가 잘려나가 비정형이 되었고, 법전(法殿)이 설 공간은 상징성을 확보하기엔 한계가 농후하다. 이런 제약 요소들이 궁궐 토지이용 한계로 작용했다.
 
중화전 뒤에 있는 즉조당. 준명당과 칸으로 연결되어 있다. 석어당 서측 후면에 자리하여, 덕수궁 전각의 축과 좌향을 결정 짓는 기준점이 되었다.
▲ 즉조당 중화전 뒤에 있는 즉조당. 준명당과 칸으로 연결되어 있다. 석어당 서측 후면에 자리하여, 덕수궁 전각의 축과 좌향을 결정 짓는 기준점이 되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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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개수하기 이전 경운궁은 즉조당(정전)과 석어당 등 몇몇 전각에 불과했다. 따라서 남향 인화문(仁化門)과 편전인 준명당, 침전인 함녕전이 건설된 상태에서 1897년 왕이 환궁한다.

1900년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중창에 들어간다. 터는 곳곳이 비정형이지만, 선원전 일곽과 돈덕전 및 중명전 일곽도 1900∼1902년 사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명실상부 '황제의 궁'으로서 위용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화전 일곽 모든 전각은 1904년 화재로 다시 짓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선원전 및 중명전 일곽, 돈덕전과 구성헌 등이 사라져 버린다.

규칙에서 벗어난 전각 명칭
 
덕수궁 법전인 중화전. 1902년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화재 후 중건 하면서 단층으로 변모함. 이름에 政이 아닌 和를 사용함으로써 당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를 나타냄.
▲ 중화전 덕수궁 법전인 중화전. 1902년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화재 후 중건 하면서 단층으로 변모함. 이름에 政이 아닌 和를 사용함으로써 당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를 나타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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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궁궐 법전(法殿)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명칭 가운데 政(정)을 넣는다. 경복궁-근정전, 창덕궁-인정전, 창경궁-명정전, 경희궁-숭정전 등이다. 하지만 경운궁 법전엔 중화전(中和殿)을 썼다. 政이 아닌 和를 정전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中和(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바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독립국이자 영세중립국으로서 대한제국 위상과 염원을 담아내려는 의지의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정문도 그렇다. 궁궐 정문은 가운데 化(화)를 넣는다. 경복궁-광화문, 창덕궁-돈화문, 창경궁-홍화문, 경희궁-흥화문 등이다. 물론 경운궁도 환궁당시엔 남향의 인화문이 정문이었다. 지금의 중화문 부근에 있었으나, 중창 과정에서 사라진다.
 
1904년 이전 모습. 3도 월대가 뚜렷하고, 우측으로 서양식 사무공간이 보임. 현재의 시청앞 광장 부근에 위치하였고, 1906년 중건을 거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꿈.
▲ 대안문 1904년 이전 모습. 3도 월대가 뚜렷하고, 우측으로 서양식 사무공간이 보임. 현재의 시청앞 광장 부근에 위치하였고, 1906년 중건을 거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꿈.
ⓒ 이영천_복원현장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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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이 대신한다. 1904년 화재 후 중건하면서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부른다. 大漢(대한)은 '큰 하늘'이란 뜻으로 곧 '나라가 창대해짐'을 염원하는 뜻을 담았다.

동문을 정문으로 삼은 의도는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지은 환구단을 향한 지향 축과 거리, 접근 및 연계성과 관계 있어 보인다. 또한 도시가로를 경운궁 중심의 방사형으로 정비하면서, 대한문을 시작점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읽힌다.

중화전과 대한문

궁궐 구성은 삼문삼조(三問三朝)가 원칙이다. 경복궁 삼문은 광화문-홍례문-근정문이 이루는 축이다. 이 축을 따라 삼조는 육조거리(외조外朝)-근정전(치조治朝)-사정전·강녕전·교태전(연조燕朝)이 구성하는 건축물 배열이다.

덕수궁은 대한문-(사라지고 없는)조원문-중화문이다. 삼조 중 외조는 대한문과 조원문 사이에 관료들이 근무하는 관청(궐내각사, 의정부, 원수부 등)이 있었다. 주요 정치행사와 조회 등이 열린 치조는 중화전이, 왕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연조는 즉조당을 비롯한 나머지 전각들이 이루는 공간이다.
 
1904년 화재 이전 모습. 현재 석조전 자리에 지금은 사리진 구성헌이 보이고, 중화문에 잇댄 행각도 뚜렷함.
▲ 중층의 중화전 1904년 화재 이전 모습. 현재 석조전 자리에 지금은 사리진 구성헌이 보이고, 중화문에 잇댄 행각도 뚜렷함.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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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삼조체계를 갖추기 위해선 중화전 건립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 지금의 중화문 남쪽으로 궁장을 넓히고 확장한다. 중화전은 1902년 1월 착공하여 8월 중층으로 완공된다. 중화전 완공으로 삼문삼조가 완성된다.
 
삼문삼조를 이루는 한 축으로 정전인 중화전으로 드는 문.
▲ 중화문 삼문삼조를 이루는 한 축으로 정전인 중화전으로 드는 문.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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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문은 중화문 동측 행각 끝에 동향으로 서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대한문까지 거리는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 지금의 시청 앞 광장 부근에 대한문이 서 있었다. 그 사이엔 외조를 구성하는 관청이 들어차 있었다.
 
태평로 확장으로 궁장이 뒤로 밀리면서 섬처럼 남아있는 대한문. 1970년 현 자리로 이전됨.
▲ 1968년 대한문 태평로 확장으로 궁장이 뒤로 밀리면서 섬처럼 남아있는 대한문. 1970년 현 자리로 이전됨.
ⓒ 이영천_복원현장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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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지금의 대한문은 뒤로 수 십 미터 밀려난 자리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태평로를 넓히고 직선화하면서 궁장이 서측으로 밀려난다. 당시 대한문도 같이 밀려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를 다시 1968년 광포한 불도저 서울시장이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다시 궁장을 서측으로 밀어내고, 대한문을 섬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를 1970년 현재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궁궐로 드는 곳에 놓인 금천교도 묻혀 있었다. 1986년에서야 발굴된 금천교는, 그 바람에 대한문과의 관계에서 무척 옹색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대한문 앞 월대(궁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도 이 과정에서 훼손당해 묻혀 버린다. 당초 3도(三道) 월대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도(一道)로 변하고 종국엔 밋밋한 경사로가 되어 버린다. 이마저 1970년 이전 과정에서 사라져 버린다. 2021년 10월 현재 대한문 월대는 복원 중이다.

남아있는 그 외 전각들
  
오랜 시간 중화문 앞에 있다가, 최근 제 자리를 찾음. 이 문 북측이 함녕전 일곽.
▲ 광명문 오랜 시간 중화문 앞에 있다가, 최근 제 자리를 찾음. 이 문 북측이 함녕전 일곽.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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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를 지나 수십 미터 북쪽에 최근 이전한 광명문이 나온다. 이 문을 지나면 함녕전 일곽에 닿는다. 경운궁을 정궁 삼아 환궁하면서 여러 목적으로 지었으나, 주로 침전기능을 수행한 건물이다. 1904년 화재가 함녕전에서 시작되었다.

그 서측에 왕후 민씨 혼전으로 지은 덕홍전이 있다. 이후엔 황제가 고위관료와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곳으로 주로 쓰였다. 용안문이 덕홍전으로 드는 문이다.
 
덕수궁 내 유일한 중층으로, 1906년 다시 지어짐. 선조 환궁 당시 모습을 유지하려고 단청 등을 하지 않은 채 민가의 모습을 지키고 있음.
▲ 석어당 덕수궁 내 유일한 중층으로, 1906년 다시 지어짐. 선조 환궁 당시 모습을 유지하려고 단청 등을 하지 않은 채 민가의 모습을 지키고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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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 후면에 중층 민가 풍의 석어당이 있고, 그 서측에 즉조당이 있다. 즉조당은 이곳에서 광해군과 인조 등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선조 환궁 3주갑(180년)에는 영조가, 5주갑(300년)에는 고종이 이곳에서 선조의 고난을 기리기도 했다.

즉조당 서측으로 준명당이 있다. 역시 고종 환궁 시 지어진 전각으로 신하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편전기능을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은 어느 곳이건 장소성을 갖고 있다. 장소성은 우리가 치러온 역사 자체일 뿐더러, 그 역사가 내리누르는 현재의 무게에 다름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덕수궁은 아직도 '경계'에 선 곳이다.

경계는 물러가는 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의 첨예한 대척점이다. 경계에 선 그때, 우리는 덕수궁에서 나라를 잃었다. 주권과 국체를 빼앗겼다. 또한 문화와 역사는 물론 어쩌면 면면히 이어오던 정신과 가치관마저 빼앗겨 버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앗긴 것들은 여전히 현재에 잇닿아 퍼덕이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친일이 그렇고, 독버섯처럼 자라나 그때 나라를 팔아먹은 집단을 닮아가는 세력이 또한 그렇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불의와 반동을 앞세우는 자들과 싸우는 중이다. 그래서 덕수궁은 여전히 경계에 서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장소성으로 덕수궁은, 그래서 더욱 날카로운 칼을 벼려내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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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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