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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D.P. > 화면 갈무리
 드라마 < D.P. > 화면 갈무리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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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P. >

유튜브와 넷플릭스 시대에 프로그램 등급제는 실효성이 있는 것일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학교 4학년 강의실과 다르지 않다. 11세 어린이가 시청할 수 없는 드라마 대사를 수시로 들을 수 있다. 가끔은 내가 보는 드라마와 겹쳐서 귀가 솔깃한다. 그러다 뒤늦게 떠오르는 사실, 그거 청소년 관람불가인데.

"이병 안준호!"

드라마 < D.P. >가 유행할 무렵, 관등성명 대는 소리가 한참 들렸다. 나는 악몽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관등성명 놀이가 어떤 건지 알기나 할까. 군 시절 한 달 선임 중에 신XX라는 친구가 있었다. 성이 신씨다 보니 이를 활용한 가혹행위를 자주 당했다. 송모 병장이 신 이병의 팔뚝을 쿡 찌른다. 

"이병 신"(다시 쿡)
"이병 신"(다시 쿡쿡)


이름을 채 말하기 전에 계속 몸을 건드려서 "이병 신"만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 D.P. >에서 보여주는 내무반 생활은 슬리퍼 던져 후임 머리를 맞추고, 못 튀어나온 벽에 사람을 민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아이들이 보아서 도움이 될 장면은 아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이를 좀 더 먹고 성인 콘텐츠를 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어딘가 모르게 공허하다. 학교 밖까지 내가 붙어 다니며 제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님과 함께 본다고 하면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펜트하우스>
     
아이들을 데리고 수생 식물을 관찰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과학 교과에 '식물의 생활'이 나오기도 하고,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선생님이 마침 교과서에 등장하는 식물을 키우고 계셔서 기회가 좋았다.

개구리밥과 부레옥잠을 시작으로 하나씩 관찰하며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소시지를 닮은 부들 열매를 좋아해서 한 번씩은 꼭 만졌다. 마지막으로 수련 차례였다. 연꽃과 달리 잎이 물에 떠 있는 수련. 그러나 나의 설명은 중간에 계속 끊겼다. 

"심수련! 큭큭큭"

자꾸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수련이 그렇게 웃긴 말이었나. 결국은 반장이 참다못해 "심수련 하지 말라고. 쌤! 얘들 펜트하우스 봐요!"라고 일러바쳤다. 펜트하우스는 뭐고, 심수련은 또 뭐야.

나중에 찾아봤더니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심수련'이었다. 드라마 등급은 기본 15세이나 특정 회차에 따라 19금 제한이 걸렸다. 선정적인 장면으로 논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심수련을 외친 녀석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나 우리 엄마랑 같이 보는데? 메롱이다."

나는 차마 '우리 엄마 찬스'를 면전에서 꾸짖을 수 없어서, 수업에 집중하라고 주의를 돌렸다. 본인 나이에 맞지 않는 콘텐츠를 접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방금처럼 부모와 함께 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TV나 컴퓨터에 어른의 계정으로 자동 로그인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이다. 별도의 교육이나 제지가 없는 한 자극적인 콘텐츠는 손쉽게 아이들의 뇌를 사로잡는다.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소개 화면 갈무리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소개 화면 갈무리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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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화제를 모으면서 추억의 놀이가 부흥하고 있다. 어디서나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구슬치기까지 각양각색이다. 드라마의 잔혹성을 논외로 하면 아이들이 어우러져 노는 모습 자체는 정겹다. 흐뭇한 기분이 들어 어디서 이 놀이를 배웠냐고 물었다. 

"유튜브에 '오징어 게임'이라고 치면 노는 거 다 나와요."

넷플릭스에 가입하지 않은 아이도 <오징어 게임>의 놀이 장면을 볼 수 있었던 비결은 유튜브였다. 유튜브가 아니더라도 네이버나 다음에서 '오징어 게임'을 치면 블로그 포스팅 형태로 관련 정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신나게 하던 우리 반 모군이 내게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선생님, '오징어 게임' 4화 27분에 재미있는 게 나온대요."
"아? 그러니."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하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나도 <오징어 게임>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4화 중반에 화장실 러브씬이 나왔다. 시간대는 27분쯤. 아이가 말한 재미있는 장면이 바로 이것이었다.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정말로 아이가 <오징어 게임>을 보고 내게 말을 한 걸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장난기는 있지만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 성격이다. 다음날 나는 슬쩍 함정을 파듯 물었다.

"<오징어 게임> 4화 재밌었니?"
"<오징어 게임>이요? 몰라요. 애들이 무슨 줄다리기 한다고 그러던대요."


녀석은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부끄럽거나 혼날 요소가 있으면 말을 아끼는 모범생이 담임교사에게 화장실 씬 따위를 의도적으로 언급할 리 없다. 엉뚱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전설의 그 녀석은 정말로 본 걸까, 아니면 유튜브 요약 영상 따위를 흉내 내는 걸까. 실체를 캐 볼까 하고 3초간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학생이 먼저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결국 유치한 취조 비슷한 것이 되고 말 테니까.

그나저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질린 아이들이 점점 새로운 놀이를 개발하고 있다. 엉터리 규칙이 대부분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논다. 

"마지막 게임은 오징어 게임입니다. 오징어와 닮은 사람이 탈락입니다."
"민XX은 1초 만에 탈락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생각하는 오징어 게임은 이런 것이다. 피 튀기고, 사람이 높은 곳에서 사정없이 떨어지는 잔혹극보다는 교실의 오징어 게임이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4학년 교실에서 <오징어 게임>이나 < D.P. > 같은 낱말을 안 들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세상 물정에 무지한 교사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걱정하는 진심을 담아 부드럽게 타이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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