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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살피며, 개를 애지중지 돌봤다.?
 할머니는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살피며, 개를 애지중지 돌봤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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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에겐 뭐든지 아껴야 한다는 것이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막내딸을 뱃속에 품은 채 남편을 여의고 일찍 혼자가 되셨으니, 홀로 오남매를 먹이고 입히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식은 물론 손주들까지 장성한 뒤에도 할머니는 여전하셨다. 

할머니는 결코 음식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불어 터진 면도, 쉬어버린 감자도 끝까지 드셨다. 누군가 버렸다가 들키는 날에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낡은 냄비를 바꾸시라고 새것을 사드려도, 다음에 가면 전보다 더 낡은 고물 냄비가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옷도, 식기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음식을 남겨도 역정을 내시고 누구도 늦잠 자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해 이른 새벽마다 기어코 깨우셔야 했던 할머니. 나는 그런 할머니로부터 좀처럼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다. 일 년에 몇 번씩 뵐 때마다 늘 어렵고 불편하기만 했다. 

늘 무뚝뚝하게만 느껴지던 할머니가 유난히 다정해 보일 때는 따로 있었다. 장손인 두 살 터울의 내 남동생을 대하실 때도 조금은 그러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바로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대할 때였다. 할머니는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살피며, 개를 애지중지 돌봤다. 

말수가 많지 않은 할머니지만 가끔 개 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하셨다. 자꾸만 따라다니며 재롱을 부린다고. 어찌나 귀엽고 든든한지 모른다고. 할머니의 반려견 사랑은 여전한 채 시간은 계속 흘렀다. 개는 할머니보다 빠르게 늙었고 점점 앓는 일이 많아졌다.

시골에 놀러 간 어느 여름. 복날이 되자 할머니는 그 개를,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시던 개를 동네 청년들에게 넘겼다. 열두어 살 무렵의 나는 입을 떡 벌릴 만큼 놀랐고 할머니가 무섭게 느껴졌다. 고백하자면, 아주 잠깐은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를 떠올리기도 했다. 

할머니도, 그 상황도 무서웠지만, 나는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뜻밖에도, 할머니는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반문하셨다. 

"그럼 어떡하노?"

할머니는 개를 먹지 않았다 

그날, 보신탕을 끓인 동네 이웃 한 분이 오셔서 할머니께 한 대접 가져다드릴까 물었다. 예의였을까, 딴엔 농담이었을까. 의도가 뭐였든지간에, 할머니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친 욕을 퍼부으셨다. 내가 알기로, 할머니는 개를 드신 적이 없다.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할머니에게 개는 소와 같았을 것이다. 대규모 축산 현장은 가본 적 없지만 한두 마리의 소를 키우는 분들은 본 적이 있다. 모두들 소를 사랑으로 대했다. 어여삐 여기고, 아픈 데는 없는지 돌보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음으로 인도했다.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한 적이 있다. 키우던 개를 식용으로 내놓다니, 다들 대번에 경악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할머니는 드신 적이 없다고, 오히려 깊이 슬퍼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해도 그 놀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 의문이 든다. TV에서는 살아 있던 물고기가 해체되고, 핏빛 가득한 고깃덩어리가 조리되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며, 누군가는 1인 1닭을 외치며 포식을 자랑하는데, 여기엔 문제가 없는 걸까. 어떤 죽음은 슬프고 어떤 죽음은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건 언제, 누가 정하는 것인가. 

자연 수명은커녕 성체에 이르지도 못한 동물을 도축하는 것은 문명이고, 평온한 삶을 함께 하다가 떠나 보내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동물이 생명임을 완벽하게 부인할수록 문명에 더 가까워지는 것인가. 

왜 어떤 죽음은 돌아볼 가치가 없나 

문득 생각해 본다. 어쩌면 애지중지 키우던 늙은 개를 삼복더위에 지친 이웃들에게 내어주고 눈물짓던 할머니가, 생태계의 순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몸소 실천하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인지하며 늘 겸손하게 사셨기에, 치매를 앓는 중에도 밭일을 하며 자신의 쓸모를 다하려 한지도 모른다고.

할머니의 삶이 조금 더 여유로웠다면, 쓸모 외에 다른 걸 우선순위로 올리실 수 있었다면, 다른 결말을 택할 수 있었을까. 개를 품에 안은 채 마지막 숨을 거두게 하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한평생 최선을 다해 온 그녀의 삶을 깊이 연민하고 존경할 뿐, 조금도 탓할 생각이 없다.

비건을 지향하는 나는 결코 개를 식용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라도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단, 어떤 동물은 죽어 마땅하고, 어떤 동물은 그럴 수 없다는 그 기준이 진정 온당한 것인지 같이 고민해 보고 싶을 뿐이다. 

지난 27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주례회동 자리에서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언급했다. 이 발언 이후, 개 식용 금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할머니가 내게 남긴 질문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나눠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이 입을 삼베 수의를 손수 짓고 흙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그녀를 가깝게 여긴 적은 없지만,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멈칫하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정답은 모르지만,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나는 한참 더 할머니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태그:#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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