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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유족회는 국회 앞에서 2021년 6월 29일 특별법이 통과 될 때까지 총 400회에 가까운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이자훈 서울유족회 회장과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서울유족회는 국회 앞에서 2021년 6월 29일 특별법이 통과 될 때까지 총 400회에 가까운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이자훈 서울유족회 회장과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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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특별법이 6월 29일 제21대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7월 20일 국무회의를 거쳐 공포됐습니다. 지난 세월 여순사건 학살 피해자들은 왜곡된 역사 속에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죄인으로 옭아 맨 제도적 장치 중 하나가 '연좌제'입니다.

우리나라는 개인의 죄를 특정 범위의 사람들이 함께 지고 처벌되는 연좌제를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칙령으로 금지했으나, 일제 강점기 '요시찰명부'를 통해 되살아났고 해방 후 남북의 체제 대립 상황 속에서 '신원조회'라는 이름하에 사회적 관행으로 공공연히 실시됐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회적 억압 장치는 제5공화국 때인 1980년 10월 27일 헌법에 명시해 공포한 뒤 다음해 3월 25일 내무부 지침으로 연좌제를 공식 폐지했습니다. 연좌제 폐지가 공식화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는 지난 2003년 12월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 497쪽은 연좌제 피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4‧3사건의 경우 이미 1950년 8월에 27,000명의 보도연맹원과 5만여 명의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사찰당국에 의해 별도 관리되었다. 제주도 경찰‧행정당국에는 당시 관련자 명부가 따로 비치되어 각종 신원조회에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경찰이 관리하다가 파기되지 않고 외부로 유출되어 최근에 공개된 <형살자명부>는 각 리별로 4‧3사건으로 총살‧징역‧압송된 사람들의 명단, '숙청' 일시, 장소 등을 적고, 별도로 유가족 상황을 빠짐없이 기재한 명부이다. 이 명부는 그 작성‧비치 목적이 4‧3사건 관련자의 유가족 관리를 위한, 즉 연좌제 적용 문서인 것이다."

"여순사건 격랑 속 아버지 등 친인척 8명이 총살‧수장 당했다"

위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좌제에 묶인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와 제재를 받으며 공무원이 되지 못했고, 사관학교 입학도 금지됐습니다.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못했으며, 직장에서의 진급도 어려웠습니다. 그야말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따가운 시선과 배제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연좌제의 고통스럽고 음습한 사슬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며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의 격랑 속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친인척 8명이 총살‧수장 등을 당했고, 자신도 대학 졸업 뒤 연좌제에 쫓겨 일본으로 밀항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자훈 서울유족회 회장의 아버님은 1950년 6월 30일 저녁 여수 앞바다에 위치한 애기섬에서 총살당한 뒤 수장됐습니다. 2018년 9월 18일 70년만에 처음으로 애기섬 앞바다에서 위령제 및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이자훈 서울유족회 회장의 아버님은 1950년 6월 30일 저녁 여수 앞바다에 위치한 애기섬에서 총살당한 뒤 수장됐습니다. 2018년 9월 18일 70년만에 처음으로 애기섬 앞바다에서 위령제 및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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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훈 여순항쟁서울유족회 회장(1941년생, 81세)은 일본 오사카에서 1982년 한국 전문 서점인 '서울서림'을 운영하며 한국의 진보 지식인과 민주인사들을 오래도록 만나 왔습니다. 최근 그는 한국으로 건너와 아버지와 친인척들의 한을 풀고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2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5가에 위치한 여순항쟁서울유족회 사무실에서 이 회장을 만나 유족회 활동과 여순사건특별법 제정 이후의 계획에 대해 들었습니다. 다음은 이 회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 연좌제에 묶여 한 많은 인생을 사셨다 들었습니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회장님 개인과 가족사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저의 아버지를 위시해 친‧인척 8인이 여순사건으로 학살됐습니다. 제 고향은 비렁길로 유명한 여수시 남면 우학리입니다. 셋째 큰아버지는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여순사건 당시 셋째 큰아버지와 장남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부산으로 피하셨는데 여수경찰서 특별수사대를 만들어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체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결국, 특별수사대는 1950년 6월초 셋째 큰아버지를 체포했고, 아버지도 6월 중순경 율촌역 앞에서 체포되어 형제가 여수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셋째 큰아버지는 6월 26일 아침, 여수 만성리 굴 앞에서 총살당한 뒤 불태워져 시체를 찾지 못했고 아버지도 6월 30일 저녁 여수 앞바다에 위치한 애기섬에서 총살당한 뒤 수장됐습니다. 또, 백부의 장손은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고, 중부의 장남은 대구형무소에서 학살당했으며, 셋째 큰아버지의 장남과 차남은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셋째 고모와 고숙도 여수에서 학살됐습니다.
 
서울유족회는 2019년 7월 4일 서울 종로 2가 문화공간 ‘온’에서 유족 50여명이 모여서 창립식을 가졌습니다.
 서울유족회는 2019년 7월 4일 서울 종로 2가 문화공간 ‘온’에서 유족 50여명이 모여서 창립식을 가졌습니다.
ⓒ 서울유족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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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어머니와 저는 외가인 여수로 와서 외삼촌댁에 의지해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는 2년 반 정도 밖에 못 다녔습니다. 여수서중과 여수 수산고등학교를 나와 1961년 서울 건국대학교에 입학 할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체포령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박정희 군사정권 장기화를 예견하고 일본 밀항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연좌제의 족쇄를 피하고 일본에서 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밀항했으나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는 연구 생활을 할 수 없어 포기했습니다. 이어, 재일 한국장학회 사무국장, 전무이사를 역임하며 2,3세 동포 자제들을 육성했습니다. 1982년 채류 자격을 획득하여 오사카 최초의 한국학 전문서점인 '서울서점'을 열었고 일본의 각 대학, 전문기관, 도서관, 언론계, 학계 등의 한국학 연구원들에게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인사들과 교류를 하면서 통일운동에 주력했습니다. 1982년 서울서점 창립과 동시에 일본 최초의 2,3세들 중심의 통일문화축제 '이꾸노 통일문화제'를 열고 20년 동안 후원했습니다. 이제 제 나이 80세에 여순항쟁의 마무리와 역사 바로세우기 그리고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에 매진하여 자주 통일에 여생을 바칠 각오입니다."  

국회 앞 1인 시위, 왜곡 방송 정정, 사보임 건의서 제출
 
서울유족회는 ‘사보(辭補)임 촉구 건의서’를 각 의원들에게 돌리고 민주당 당론 채택을 위해 힘썼습니다.
 서울유족회는 ‘사보(辭補)임 촉구 건의서’를 각 의원들에게 돌리고 민주당 당론 채택을 위해 힘썼습니다.
ⓒ 서율유족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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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관련 7개 유족회가 있는데 서울유족회가 마지막으로 결성됐습니다. 전체 유족회 결성 과정과 특별히 기억나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서울유족회는 2018년 여수에서 열린 여순사건 70주년 기념추념식 때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상의를 해서 추진됐습니다. 이후, 2019년 7월 4일 서울 종로 2가 문화공간 '온'에서 유족 50여명이 모여서 결성했습니다. 서울유족회 결성은 1997년부터 꾸준히 이어온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특별법 제정 운동과 역사 바로세우기 노력의 결실이고, 촛불혁명과 민주당 정권의 탄생이 밑거름이 됐다고 봅니다."

-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공포되기까지 서울유족회가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동안 진행한 사업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첫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유족들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고령인 유족들이 추위와 더위 그리고 비 오는 날도 쉬지 않고 꾸준히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2021년 6월 29일 특별법이 통과 될 때까지 총 400회에 가까운 유족들의 1인 시위가 큰 활동이었습니다.

둘째, 2019년 4월 21일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여순사건에 대해 소개하면서 '반란'이라는 용어를 수없이 사용하며 역사왜곡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유족회에서는 항의 투쟁을 추진하여 KBS로부터 정식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이후, 이영일 이사장과 제가 2021년 3월 7일 KBS 2TV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에 출연해 역사왜곡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셋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거의 매일 국회를 방문했는데 특히, 2021년 3월 3일 행정안전위원회 제1소위원회 특위에서 특별법 원안에서 대폭 퇴보한 수정안이 제출되어 한병도 간사와 담판을 하고 오후 4시에 수정안 철회를 관철한 점이 기억납니다.

넷째, 특별법을 논의하는 해당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에 전남 동부 지역 국회의원들이 전무한 상태에서 진행이 늦어지는 상황일 때 '사보(辭補)임 촉구 건의서'를 각 의원들에게 돌리고 민주당 당론 채택을 위해 힘쓴 일이 떠오릅니다.

다섯째, 누더기처럼 수정된 특별법 안이 행안위에 상정되어 개정 작업을 해야 하는데 LH사태로 국회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표 발의한 의원조차 상정된 수정안을 받아들이고 묵인한 점은 천추의 한으로 남습니다."
   
"유족회 대국적 견지에서 범국민위원회로 단결 필요"
 
9월 1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역사 바로세우기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9월 1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역사 바로세우기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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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개 유족회가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단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족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완전한 진상규명과 빠짐없는 명예회복이 이뤄지도록 시행령 보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관료들의 전횡을 막고 전문성과 우수한 인력을 투입하여 여순사건 학살 피해자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급히 실시해야 합니다. 또, 정부에 자료 제출권 등을 합심하여 요구해야 합니다.

유족들은 지금까지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던 입장에서 이제는 유족이 심사받는 입장입니다. 특별법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완전한 진상규명을 위해 지난 9월 10일 발족한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역사 바로세우기 범국민위원회'가 창립했습니다. 유족회는 이 단체와 합심해야 합니다. 종래의 지엽적인 생각에서 탈피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단합하고 단결하여 차원 높은 유족회로 변모해야 하겠습니다."

- 끝으로 향후 계획과 하고 싶은 말씀은?
 "사명감과 책임감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역량 부족을 통감하면서 첫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전력을 쏟을 생각입니다. 둘째, 이런 작업을 완전하게 이루기 위하여 시행령과 특별법 개정 보완에 전력을 기울일 생각이고요. 셋째, 진상규명이 끝난 후 후속사업 추진을 위해 여순사건을 기리는 기념공원 조성과 역사 바로세우기 교육 그리고 트라우마센터 등 후생사업과 생명과 인권이 존중받는 상생의 사업을 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넷째, 여순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 졌는데 민족 말살, 반통일, 민주 역행, 반문명적 악법 철폐에 전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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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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