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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나 조지 포크가 미국에서 조선사절단과 동행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이벤트는 '국서 제정식'이었지요. 여기에서 '국서'라 함은 고종 임금의 친서로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사신에 대한 신임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두 통의 문서인 셈이지요.

1883년 9월 18일. 나는 그날 무척 바빴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쓰면서 안내와 조언을 해야 했고 통역까지 해야 했으며 취재 경쟁에 돌입한 현지 신문과도 접촉해야 했으니까요. 의전, 통역, 언론을 내가 다 관여했다는 말이지요.

뉴욕 중심가에 소재한 호텔 3층(미국 대통령과 민영익의 객실이 인접)의 민영익 방에서 우리는 그날 아침 10시 반 경에 만났습니다. 최종적으로 행사 세부 사항을 점검한 뒤에 우리는 방을 나와 행사장이 마련된 1층의 대접견실을 향해 이동하였지요. 접견실 앞쪽에 부속된 대기실에 입장한 것은 11시 쯤이었습니다.

대기실과 접견실은 중간에 여닫을 수 있는 칸막이 문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나는 사절단을 대기실로 안내 한 뒤에 잽싼 걸음으로 맞은 편에 서 있는 대통령의 뒤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때 여닫이 칸막이 문을 활짝 열어 놓았지요. 한미 양측의 사람들은 이제 한눈에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지요. 

아더 대통령은 접견실 정중앙에 서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국무장관 프릴링휘젠(Frelinghuysen), 왼쪽에는 국무부 제1 차관보 데이비스(Davis), 국무부 관리 존 츄(John Chew)가 서 있었고 뒷줄에는 대통령 수행비서 필립스(Phillips), 메이슨 대위와 나 조지 포크 그리고 몇 명의 관리들이 도열했지요.

조선 사절단은 일렬 종대로 대기실에 입장하였는데 맨 앞에 민영익전권대신, 그 뒤로 이어서 서열에 따라, 홍영식부대신, 서광범종사관과 로웰 서기관, 그 뒤로 유길준, 변수가 따르고 맨 마지막에는 무관으로 보이는 고영철이 붙었습니다.

사절단 일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더 대통령은 놀란 눈으로 "아..." 하면서 짧은 탄성을 발했습니다. 사절단의 의상이 전체적으로 황홀하고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지요.
 
보빙사가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함
▲ 보빙사의 큰 절 보빙사가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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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조선인들이 칸막이 문지방에 이르렀을 때 전혀 예기치 않은 광경이 연출되었어요. 전권대신 민영익이 눈짓을 하자 일령 종대의 대형이 순간적으로 일렬 횡대로 변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 다음 민영익이 무언가 짧게 지시를 하자 그에 따라 모두 동시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큰 절을 하는 거였습니다. 바닥에 댄 이마를 한참 후에 들어 올린 그들은 서서히 허리를 편 후 문지방을 넘어 우리쪽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 순간 미국 대통령은 허리를 깊이 굽혔습니다. 원래 미국 대통령은 예나 지금이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니, 대통령 뿐이 아니고 우리 미국인들은 다 그렇죠. 대통령이 허리를 깊이 굽힌 장면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언론에서는 "아더 대톨령이 허리를 비상하게 낮게 숙여 절을 했다 President then made an unusually low bow"고 보도하기도 했었지요(New York Daily Tribune 1883.9.19).

아더 대통령이 허리를 펴자 국무장관이 앞으로 나와 민영익을 대통령에게 소개했습니다. 대통령이 손을 내밀자 서로 악수를 교환하였고 이어서 양측의 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물흐르듯 상견례가 끝나자 민영익이 매우 진지하고 낭낭한 목소리로 공식 인사말을 한국어로 낭독했습니다.

민영익은 인사말에서  양국 인민의 영원한 우호를 기대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말미에 "받들어 온 국서 두 봉封의 하나는 우리 대군주께옵서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답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신에 대한 전권빙거全權憑據(신임장)이온 바 삼가 이를 바칩니다"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아더 대통령은 조선의 '국서'를 정중히 받은 후 온화한 표정으로 답사를 했습니다. 그는 '대조선Tah Chosun'의 국왕과 정부 대표로 오신 전권대신과 부대신을 따듯히 환영한다고 말하고 나서 "우리는 아름다운 조선 반도와 섬들, 산물과 산업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미국이 독립국이 되었을 때의 미국 인구의 두 배가 넘습니다. 우리 두 나라 사이에 가로놓인 대양은 이제 증기선의 발달에 힘입어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 대로가 되었습니다, 조선은 우리의 이웃이지요"라고 덕담을 하였습니다.

나아가 대통령은 "우리 공화국은 국력, 부와 자원에 아쉬움이 없는 관계로, 과거 역사가 말해주듯이, 타국민을 지배하거나 타국 영토를 취할 생각이 없으며 오직 우호관계와 호혜적 통상을 통해 상호 이익을 나누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미국의 농업 기술, 교육 및 법률 체제가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될 거로 기대한다고 언급하였지요.

아더 대통령의 환영사는 전체적으로 사려깊고 우호적이었을 뿐 아니라 양국간 실질 협력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조선을 '대조선'이라 언급하고 '이웃나라'로 표현함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에 종속되지 않는 자주독립국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조선을 침략하거나 지배하려는 염사가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인들이 늘 품고 있는 외침에 대한 우려를 불식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통역은 <한국어-일본어-영어/영어-일본어-한국어>방식으로 이중 통역이 이루어졌지요. 

미국 대통령의 답사가  끝나자 두 나라 대표들은 악수를 교환하였습니다. 사절단은 물러나와 국무장관, 메이슨 대위 그리고 나 조지 포크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헌데, 또 한 번의 예기치 않은 광경이 돌발했지요. 접견실 문지방을 넘어서 몇 발짝을 떼었는데 갑자기 조선 사절이 되돌아 서는 게 아니겠어요?

다시 이마를 땅에 댄 채  아까 입장했을 때와 같은 큰 절을 되풀이 하더군요. 조선 사절단으로서는 정중한 예를 다한 것이었죠. 그 광경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냉소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 미국인들은 냉소하지 않았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을 뿐이지요.  

어쨌든 한미간의 최초의 외교 이벤트인 '국서 제정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행사는 국제 무대에서 벌어진 조선 최초의 근대적 외교 이벤트로서 그 의미가 컸을 뿐 아니라 한글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당당히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지요. 

그 날짜 '뉴욕 타임스'는 한글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며 "차 상자와 같은 알파벳 문자로서 몇 개의 자모를 합쳐서 한 개의 단어를 구성한다. 세로로 쓰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고 보도했고, 중국 글이나 일본 글과 전혀 다른 독창적인 문자라고 짚었습니다.

또한 한국어에 대해서는 그 발음이 이탈리아어처럼 매우 음악적이라고 소개하면서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유럽인은 단 두 사람 뿐"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더욱 괄목할 일은 다음날짜 '뉴욕 헤럴드'(9.19)가 조선의 국서 한글본을 독점 보도하였다는 사실이지요.
  
 
미대통령에게 한 민영익 인사말 1883.9.19일자 신문
▲ 민영익 인사말 한글 미대통령에게 한 민영익 인사말 1883.9.19일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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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이 제출한 한글본, 원본은 한문
▲ 보빙사 신임장 한글본 민영익이 제출한 한글본, 원본은 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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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국인 여러분, 세계무대에 최초로 한글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사건의 의미를 음미해 본 적이 있나요? 당시 미국인들에게 놀란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은 조선 고유의 의상과 모자 패션이었지만 미국인들의 안목을 넓혀준 것은 한글이었습니다.

한글이라는 문자의 존재는 한민족이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민족임을 단적으로 웅변해주었기 때문이지요. 한글 국서는 한 마디로 최초의 한글 외교문서였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한글의 역사 뿐 아니라 한국의 외교사 더 나아가 문화사에 있었서 기념비적인 일이라 여겨집니다.

헌데, 의문이 있습니다. 이 쾌거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는가? 누가 주장하여 관철시켰는가? 한글문은 과연 누가 작성하였는가? 즉, 누구의 필체인가? 언제 어디에서 썼는가? 왜 한국의 학자들은 이런 의문에 도전하지 않는가? 왜 아무런 정보도 없는가?

마땅히 이 문제를 풀어야하지 않을까요? 오래 궁리한 끝에 나는 몇 개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다음에 제시해 보겠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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