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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리의 미군 소방대원들이 화재 진압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한무리의 미군 소방대원들이 화재 진압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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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위해 쫄지 마라

대한민국 소방공무원 시절 현장에서 종종 들었던 말이 있다. 

갑: "김 OO 서장, 잘 계시나? 소방서 돌아가면 인사 좀 전해요." 
을: "여기 지역 국회의원이 내 친구야..."
병: "우리 건물은 소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볼 필요 없어요. 내가 지역 OO협의회 회장이라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쓴다고..." 

소방검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대체로 많은 소방관들이 기싸움에서 밀리게 된다. 하지만 이 말들은 상당수가 확인할 수 없는 허위이거나 과장인 경우가 많다. 

앞의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갑: "보아하니 말단 직원인 것 같은데 설마 내 안부를 전할 수 있겠어? 내가 소방서장과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게 해 주자."
을: "소방서장보다 높은 사람을 안다는데 설마 나한테 함부로 하겠어? 자기가 국회의원에게 가서 직접 확인해 볼 것도 아니고..."
병: "일단 내 직책을 강조해서 자율적으로 잘 알아서 관리하고 있다고 강조해 보자." 

설령 이런 의미를 간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소방관도 결국은 눈치를 봐야 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내에도 퇴직 후 외부업체의 고문이나 통역으로 재취업해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보통 이들은 부대 소방서를 방문하면 "내가 OO 상급부서에서 30년간 근무했다"라거나 "내가 유류시설 전체를 관리했었다"라는 식으로 거창하게 포장된 말들을 늘어놓는다. 

매번 그럴 때마다 반응하는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선배님께서 상급부서에 계셨으니 규정을 더 잘 아시겠네요. 원칙대로 잘 부탁합니다"인데, 이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일그러진다. 아마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방관의 임무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오히려 "세심하게 점검해 주시고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고치는 것이 곧 일이요, 돈이 드는 일이다 보니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의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내가 OOO 국회의원을 안다거나, 의사협회장 잘 계시냐고 묻는다거나, 또는 내가 지역 OO협의회 회장이라 내 몸 관리는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대충 검진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소방검사를 하다 보면 소위 말이 통하지 않는 진상을 만날 수도 있다. 심지어 소방관에게 "우리나라 법이 어떻고 정책이 저떻고..." 하며 소방관이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도 있으며, 유흥업소를 점검하다 보면 간혹 조직폭력배를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현장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장에서는 품위를 잃지 말고 기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민원인의 말투와 표정에 따라 내 원칙과 고민의 순서가 뒤바뀐다면 소방검열관으로 근무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권한다.  

필자가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소방서의 소방검열관이 되었을 때 맨 처음 상관으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이 있다. "누군가 나를 안다고 하면 더 엄격하게 소방검사를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몇 권의 두꺼운 규정집을 건네면서 법과 기준을 잘 알아야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에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규정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법집행 이전에 관계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래서 이 규정을 지키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어떻게 좋은지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도 개발해야 한다는 조언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지난 20년 동안 미국 사람들로부터 "누구 잘 있느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교과서에 나온 것들을 현장에서 충실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 관계인과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했던 실천만이 있을 뿐이다. 

아직도 여러 현장에서는 이런저런 트집과 핑계로 의도적으로 소방검사의 본질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있다. 아울러 누구와의 인맥 또한 소방검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동안 발생했던 크고 작은 화재는 결국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의 이기심 내지는 안전에 관한 무관심과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어제 안전했다고 해서 오늘도 안전한 것은 아니며, 어제 발생한 사고가 오늘 또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화재예방은 마라톤이다. 결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어쩌면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는 "Never Ending Story"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소방검열관은 쉽게 지쳐서는 안 된다. 소방검사를 할 때에도 진지함과 엄격함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으레 과장된 사람들도 있으려니 하고 인정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소방검열관은 평생 근무하는 동안 화재예방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와 꿈을 완성해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 실립니다. 다음호에서는 전반적인 미국 소방검사의 절차에 관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태그:#이건 소방칼럼니스트, #이건 소방검열관, #미국소방, #화재예방, #소방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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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Columbia Southern Univ. 산업안전보건학 석사.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소방칼럼니스트. <미국소방 연구보고서>, <이건의 재미있는 미국소방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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