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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각)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 연구소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식에서 독립유공자 김노디 지사 후손 위니프레드 리 남바 옹에게 애국장을 수여한 뒤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각)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 연구소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식에서 독립유공자 김노디 지사 후손 위니프레드 리 남바 옹에게 애국장을 수여한 뒤 두 손을 맞잡고 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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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미국 현지시각) 문재인 대통령이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해 고(故) 김노디·안정송 지사에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해외에서 대통령이 직접 독립유공자 훈장을 추서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추서된 두 분 중 김노디 지사의 행적에 대해 이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해본다.

하와이에서 조선까지...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노디

김노디 지사는 1905년 5월 8일에 아버지 김윤종(1852~1936)과 어머니 김윤덕(1858~1937), 오빠 김병건 부부, 여동생 메리(1901~1907)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 왔다. 오빠 병건보다 아래인 언니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같이 오지 못했고, 메리는 1907년에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아버지는 와외파후 농장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과 산파로 가계를 도우며 생계를 꾸렸다.

김 지사는 호놀룰루에 있는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운영한 스잔나 웨슬리홈에 기숙하면서 약 4마일 떨어진 카아후마누 초등학교에 전차로 통학, 1915년 8학년을 졸업했다. 1910년 3월에 대한제국의 외부협판 윤치호가 두 번째로 호놀룰루를 방문해 한인기숙학교 내 교회 앞에서 교인과 학생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을 때 김 지사의 모습도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14년, 김 지사는 당시 한인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소개장을 보내고 장학금 등을 받도록 여러 곳에 편지를 보내는 활동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김 지사도 이승만의 도움을 받은 학생 중 하나였다. 이승만의 도움으로 오하이오 주의 우스터 고등학교에 진학한 김 지사는 졸업 후 후버 대학교에 잠깐 다니다 오벌린 대학교로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오벌린 대학생 시절의 김노디 선생(1922년)
 오벌린 대학생 시절의 김노디 선생(1922년)
ⓒ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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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4일, 김 지사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표자대회에 6명의 여성 대의원 중 한 명으로 참석한다. 대회 첫 날 한인대회 의장 서재필의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김 지사는 다음과 같이 연설하며 여성평등과 한국 독립을 설파했다.
 
"여성들은 한국 남성들로부터 일종의 열등한 창조물로 간주됐으나 최근 몇 년 동안에 한국 남성들이 문명국의 여성이 남성과 균등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우리 한국 여성들도 한국 남성들과 같이 협조해 일하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는 일을 돕고자 하고 있습니다."
 
김 지사는 이 연설로 유명인사가 돼 <신한민보>가 5월 6일 김 지사의 연설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선생의 활동 내용을 기사화했다. 이후 김 지사는 동부를 여행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일제 치하의 조선 사정을 알리면서 서재필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에서 조직된 한국친우회의 회원이 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16일에 조직된 단체로 친한파 혹은 지한파 미국인을 통해 조선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회원 수는 1만 명에 달했다.

김노디 지사는 1920년 5월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국친우회 대회에서도 첫 연사로 나섰다. 1000여 명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 그는 한국 여성과 소녀들이 조국의 독립과 기독교를 위해 헌신한 사실에 대해 연설했다.

그 또한 YWCA 등에서도 계속 연설활동을 했고, 새로운 단체조직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20년 6월에 오벌린 대학교에 조직된 오벌린 한국구제회의 통신원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는 어머니를 뵈러 하와이로 돌아가다가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른바 '이승만의 만 법 위반 사건'이다.

'만 법' 위반으로 이민국 조사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나...
미국 관료도 일본인 밀고자의 소행으로 의심해


선생이 어머니를 뵈러 하와이로 돌아갈 때 이승만도 캘리포니아에 갈 일 있어서 두 사람은 같은 기차로 여행하게 됐다. 선생은 이때 아마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미행자가 자신을 쫒아왔다고 얘기했는데 그 자가 익명으로 이민국에 두 사람이 '만 법(Mann Act)'을 어기고 있다고 신고했다. 법안 상정자의 이름을 따 '만 법'으로 알려진 '백인노예매매금지법'은 미국 내의 각 주나 외국으로부터 매춘이나 방탕한 행위 또는 그 외의 비도덕적 행위를 위한 목적으로 여성을 상업적으로 수송하는 행위를 중범으로 처벌하는 법이다.
 
이민국 조사관 리처드 찰시가 쓴 보고서. 마지막 줄에 Dr.Lee(이승만)와 Miss.Kim(선생)이 조선으로 보내지면 감옥 행이거나 고문치사를 당할 것이라 써져 있다.
 이민국 조사관 리처드 찰시가 쓴 보고서. 마지막 줄에 Dr.Lee(이승만)와 Miss.Kim(선생)이 조선으로 보내지면 감옥 행이거나 고문치사를 당할 것이라 써져 있다.
ⓒ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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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호놀룰루 이민국의 조사관 리차드 할시가 선생을 면담 조사한 결과, 이승만과 김 지사가 '만 법'을 위반했다는 것을 뒷받침할만한 신빙성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보고했다. 더구나 할시는 선생이 하와이에서 어머니를 방문한 후 다시 오벌린 대학교로 돌아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 있는 도항증도 발급해줬다. 

이민국에 쓴 보고서에서 할시는 익명의 신고자가 일본인일 것이며 선생에 대해 심문을 해보니 유능한 젊은 여성으로 성격상으로도 흠잡을 만한 곳이 없다고 썼다. 또 이승만과 김 지사를 한국으로 추방한다면 그들은 감옥 행이거나 고문치사를 당할 것이라고도 썼다. 즉 해당 사건은 선생이 증언한대로 일본인 밀고자에 의한 무고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오벌린 대학교를 졸업한 김노디 지사는 1922년 9월 호놀룰루로 돌아와서 곧 한인기독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23년 6월 20일, 호놀룰루의 한인기독학원의 교사로서 신축 기금 모금을 위해 재학생 20명과 고국을 방문해 인천, 신의주, 대구 등지에서 남녀평등 교육을 호소하였다. 하와이로 돌아온 뒤에는 교장 대리직을 맡아 학교 일에 헌신하며 학교 운영이 어려워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1932년까지 교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김 지사는 동지회(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조직된 단체) 계열의 부인구제회 임원으로, 남편 손승운 지사는 동지회 회장 등으로 계속 이승만의 활동을 지지하며 미주한인사회에서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손승운 지사는 1943년 하와이 당국을 대상으로 하와이의 한인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해 일본을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적국 거류민'이 아니라 '우호적 외국인'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해 1년 만에 한인들의 '적국 거류민'이라는 굴레를 벗게 해준 인물이다.

광복 후 이승만은 1953년 11월 김노디 지사를 외자구매청장(현 조달청장)으로 임명했고, 김노디 지사 부부는 서울에 살면서 1955년 2월까지 외자를 구입하고 도입된 외자를 관리했다. 이들은 1955년 7월, 하와이로 돌아왔고, 1960년 1월 손승운 지사가 작고, 김노디 지사는 1972년 5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이번 추서를 통해 선생의 위와 같은 일생에 걸친 애국적 활동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또 이번 훈장 추서식에서 아흔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대신 훈장을 받은 김 지사의 딸 위니프레드 리 남바 옹에게도 너무 많이 늦었지만 대한민국이 당신의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는 데에서 위안을 얻었길 바란다.

태그:#김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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