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8년 8월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대한항공, 아시아나 직원들과 시민들 참석해 항공재벌 갑질격파 시민행동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18년 8월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대한항공, 아시아나 직원들과 시민들 참석해 항공재벌 갑질격파 시민행동 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2018년 항공사 재벌의 갑질과 부조리에 항의하는 직원들의 집회가 열렸다. 당시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광화문에 모여서 집회를 하였는데 보통의 집회와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며, 심지어 집회 장소인 광화문에 오기 전부터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왜 얼굴을 가리고 집회를 해야만 했을까?

미얀마에서는 아직도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그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다.

아니 70년대 80년대에는 전국이 광주였는지도 모른다. 대학이 개강을 하면 학생회 출범식을 시작으로 1년 내내 집회와 시위로 정신이 없었다. 캠퍼스와 시내는 늘 최루탄과 지랄탄에 화염병과 돌로 뒤섞였다. 당시 경찰과 정보기관이 시위 주동자를 잡기 위해 늘 혈안이 되어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시위하는 사람들은 최루탄 냄새 때문에 마스크를 쓸지언정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미얀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4~5년 전 있었던 촛불집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는 집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한낱 한 회사의 부조리와 대부분의 시민이 지탄하던 갑질에 항의하는데 마스크를 써야만 했을까?

노동교육과 관련된 수업을 하거나 연수를 할 때면 으레 이런 질문을 한다. 그리고 대답은 늘 같다. "짤릴까 봐 그렇죠." 맞다. 찍히고 짤릴까 봐 마스크를 썼을 것이다. 80년대 시위를 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쓰지 않던 마스크를 2018년에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한복판에서 써야만 했다.

2016~17년 대통령은 하야하라고 외치던 수많은 촛불시위대가 가리지도 않았던 얼굴을 그로부터 불과 몇 개월 후에는 가려야만 했다. 대통령의 권력보다, 경찰이나 안기부의 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기업의 회장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론이 아니고 생활로 이어져야

직장에서 상사나 임원에게 자연스럽게 회사의 문제나 잘못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회의 시간에 얼마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학교에는 교직원회의라는 것이 있다. 말은 교직원회의지만 교사들만 모여서 하는 회의이다. 그런데 전체 교사들이 모여서 얼마나 회의를 할까? 회의라기보다는 전달사항 전달 시간일 뿐이다.

관리자나 교무부장의 지시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일어서서 '왜 그렇게 정했냐?'고 묻는다면 그는 곧 찍히고 만다. 학교에서는 이런 교사들을 두고 '벌떡 교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벌떡 일어나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장이 '질문 있으면 하라'는 말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말해봐야 받아주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가 때문이다. 고용 안정성이 높아 짤릴 걱정이 없다는 공립학교도 이럴진대 언제 짤릴지도 모르는 회사에서 자유스럽게 일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직원회의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던 교사는 자신의 교실에서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줄까? 교직원회의에서의 교장의 지위를 물려받아 그저 학교의 지침이나 전달해줄 뿐이다. 교실에서의 민주주의는 교직원회의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힘들다.

그러면 학생회는 어떨까? 당연히 학생회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 역시 교직원회의에서의 민주주의 정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사가 보고들은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민주'라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체험된 것을 몸으로 나타내는 무의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직장과도 같은 학교에서 이런 민주주의를 경험할 뿐이다. 물론 학교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치고는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몇 년이고, 선거제도가 어떻고 하며 말이다. 민주주의를 이론으로 가르치고 지필고사용으로 가르칠 뿐이다.

주기적으로 치루는 각종 선거에서 직접 투표를 한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에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지 못했는데, 지금은 내 손으로 직접 투표를 하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착각을 할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각종 기관을 총동원하여 법을 유린하는 일이 사라졌으니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할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론이 아니고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일터에서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 때 진정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터에서의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고민하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노동교육이다.

태그:#노동교육, #노동인권, #노동인권교육, #교육과정 개정, #2022교육과정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