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앞으로 <동작민주올레 시즌2>는 그동안 진행한 동작민주올레에서 빠진 부분을 채우는 방식으로 10여 차례 더 연재할 계획입니다.[기자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각)의 유엔 연설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6·25 한국전쟁 직후 박진목이 주도한 민간 차원의 '종전평화운동'을 되돌아보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중요성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박진목, 독립운동가 집안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박진목은 자신의 독립운동과 종전평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 <지금은 먼 옛이야기>을 남겼다.
▲ 박진목의 회고록, <지금은 먼 옛이야기> 박진목은 자신의 독립운동과 종전평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 <지금은 먼 옛이야기>을 남겼다.
ⓒ 경희출판사

관련사진보기

  
경북 의성 출신인 박진목(1918-2010)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박진목 집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맏형 박시목(1894-1944)을 중심으로 4형제(시목, 진목, 준묵, 중목)와 여러 조카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맏형 시목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진목은 1942년부터 만주와 북경을 오가던 박시목과 연계하여 경북 일대에서 비밀조직을 운영했다. 박시목은 노석호, 심재윤, 박봉필 등 경북 일대 젊은이들을 국외 무장 독립운동 근거지인 연안으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하던 중 형 시목을 비롯한 베이징의 동지들이 일본경찰에 먼저 체포됨에 따라 박진목도 1944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1년 2개월간 감옥살이도 했다.

북경에서 박시목, 이상훈 등이 먼저 체포된 것은 만주에서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던 이종형(친일반민족행위자)의 밀고 때문이었다. 그는 해방 직전인 7월 9일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북경에서 먼저 체포된 맏형 박시목과 조카 희규는 옥사했다.

박진목, 노량진에서 분단 현실을 안타까워하다
 
박진목은 일제 강점기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6.25 한국전쟁이 발발 직후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남과 북을 오가며 '종전평화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지금은 먼 옛 이야기>(경희출판사)에 수록된 사진.
▲ 박진목 박진목은 일제 강점기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6.25 한국전쟁이 발발 직후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남과 북을 오가며 "종전평화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지금은 먼 옛 이야기>(경희출판사)에 수록된 사진.

관련사진보기

  
해방정국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남로당 경북도당의 간부로 활동했던 박진목은 "설득과 이해 이상의 어떤 투쟁도 애국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로당과 결별했고,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9년 서울로 이주해야 했다.

박진목이 노량진과 첫 인연을 맺은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박진목은 1949년 시내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독립운동 시절 동지 채순기의 도움으로 옆집에 "방 하나를 세 얻어" 첫 노량진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셋집에는 대구청년동맹, 신간회대구지회 등의 간부로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옥살이를 했던 김선기(1906~?)도 자주 들렀다. 김선기는 1944년 함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동지이자 힘든 감옥 생활을 잘 이끌어주던 선배였다. 박진목은 1949년 자신의 노량진 셋집에서 종종 자고 가기도 했던 김선기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다.
 
일제 때 나라를 찾겠다고 같이 일했다는 동지의 정이란 참으로 놀라웠다. 어느 의사(義士)의 글에, "나는 부모의 사랑보다 아내의 사랑보다 자식의 사랑보다 더 높은 사랑을 발견했다."라는 글귀가 생각나기도 했다.(박진목 회고록 『지금은 먼 옛이야기 – 민족수난의 기록』)
 
박진목과 김선기는 한강변 나루터의 한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을 비롯하여 해방정국에서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한편, 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기막힌 현실에 괴로워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진목, 6·25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면서 '종전평화운동'에 나서다

박진목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민간차원에서 종전평화운동을 벌인 인물로 더 유명하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박진목은 남북의 지도자를 설득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을 끝내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4 후퇴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종전평화운동을 시작했다.

박진목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대동단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익환(1889-1959)과 함께 조남진의 소개로 남로당 출신의 조선노동당 제3비서 이승엽을 만나 '종전만이 민족이 사는 길'이라면서 종전을 호소했다. 이승엽은 취지에 공감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종전을 위한 실질적 논의를 위해 '남쪽으로 가서 실권으로 가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군 측의 신임장을 받아가지고 오라'고 했다.

박진목과 최익환은 남쪽으로 와 이승만 대통령과 접촉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다만 해방정국에서 하지 사령관의 통역을 했던 이용겸을 통해 미대사관 대사 대리를 만나 종전평화운동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박진목은 북한의 의중이 궁금했던 미군 정보부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박진목은 미국 측의 권유로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가서 재차 이승엽을 만나 다시 한 번 종전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때도 이승엽과는 종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굳은 악수를 했지만, 이승엽은 여전히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국 측의 신임장을 가지고 와야만 정식 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박진목, 남과 북 양측에 '간첩'으로 의심받다

그런데 10일 기한으로 추진했던 박진목의 평양방문은 북한의 기관간 소통 문제까지 겹치면서 박진목의 실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기한을 훌쩍 넘긴 40일을 허비해야 했다. 이는 박진목이 서울로 돌아온 후 북의 간첩으로 의심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박진목은 부산으로 내려가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종전평화운동에 대한 지지세를 넓혀나가면서 이승만과의 면담을 시도했다. 이때 사업을 하고 있던 박진목의 고향 선배이기도 한 서울공고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기수가 취지에 공감하면서 1200만 원의 거액을 운동자금으로 내놓아 요긴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으로 북진하여 통일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휴전에 반대하던 이승만과의 면담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간첩으로 몰려 김창룡의 특무대에 연행되어 1년 정도 감옥살이를 하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야 석방되었다.

박진목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승엽을 만나기 위해 북으로 갔던 대동단 출신의 최익환도 이승엽이 숙청되는 바람에 만나보지도 못한 채 북에서 1년 정도 억류생활을 하다 돌아와야 했다.

결국 박진목과 최익환의 종전평화운동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박진목의 종전평화운동, 조소앙 등 납북인사들을 격동시키다

하지만 박진목의 종전평화운동 차 평양을 방문한 소식이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피난하지 못하면서 납북되었던 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이들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납북인사들은 조소앙·안재홍·김약수·엄항섭·원세훈 등 5명을 대표단으로 선정하여 북한 당국과 협의하여 종전평화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호소문, 편지, 성명서 등을 작성하였고, 유엔에 대표단을 파견하고자 소련은 물론 미국 측과도 교섭에 나섰지만, 소련 주재 미국대사관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했다. 대표단의 남한 파견 역시 판문점의 미국 측 연락장교 키니 대령의 거부로 편지 전달조차 성사되지 못했다. 이들은 할 수 없이 소련 대사를 통해 편지를 유엔과 미국·영국 정부 등에 보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박진목, 평생 독립운동가를 챙기면서 평화통일을 위한 삶을 살다

박진목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혁신세력의 규합과 평화통일을 위한 운동에 나섰다. 광복회의 전신격인 (사)애국동지원호회(초대 회장 문일민)에 이사로 참여하면서 이강 등 생존해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원호하는 일도 했다. 이때 이강은 1955년 2월 9일에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애국원호회에 출석하여 제인의 집합을 고대하여 노량진 박진목씨의 초대에 응하다. 성찬을 포끽(飽喫)하고 또 유명한 가수의 창가와 가야금을 듣고 기념사진을 취한 후에 5시 반경에 회가하다. 그리하여 3시에 봉약(逢約)을 위반하다. 기왕 독립운동자들을 위하여 초대한다는 것은 희유한 사(事)로 감개무량함으로 금치 못하여 낙루까지 하다.(<이강일기>, 독립기념관 소장)
 
독립운동가 이강이 남긴 <이강일기> 1955년 2월 9일 자에는 박진목이 독립운동가들을 챙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이강일기(1955년 2월. 9일 자) 독립운동가 이강이 남긴 <이강일기> 1955년 2월 9일 자에는 박진목이 독립운동가들을 챙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박진목은 이후 조봉암을 도와 진보당 창당에도 관여했고, 4·19 혁명 이후에는 민족일보와 혁신정당 활동 등을 지원하다 5·16 군사정변과 함께 수배자의 신분에 놓이기도 했다. 이어 영남일보 상임이사(1967), 민족정기회 이사(1970), 통일촉진회 활동(1972) 등을 벌이는 등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파란만장을 삶을 살다가 2010년 사망하여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자락의 '민족정기탑' 옆에 묻혔다.

민족정기탑은 박진목이 지인들과 돌을 직접 날라 4년에 걸쳐 쌓아 1994년에 완성한 탑이었다. '平和統一(평화통일)'아라고 씌어 있는 탑 아래 글씨는 박진목이 직접 썼다고 한다. 인근에는 민족일보 사장으로 있다 5·16 쿠데타 직후 소급입법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억울하게 사형당한 조용수의 무덤도 있다.

생전에 박진목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독립운동의 목적인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훈장을 받느냐"며 아예 독립유공자 신청마저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1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가 이제 주목할 인물은 '전쟁영웅'이 아니라 박진목과 같은 '평화영웅'이 아닌가 한다.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