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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행해진 경연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그림으로 이 그림은 왕이 행차하여 유생들의 공부상황을 살피고 강의를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성균관친림강론도(19세기)  궁궐에서 행해진 경연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그림으로 이 그림은 왕이 행차하여 유생들의 공부상황을 살피고 강의를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고려대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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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들의 세상이 오다

4대 사화의 긴 소용돌이를 지나 1567년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1552~1608)가 등극한다. 선조의 등극은 본격적인 사림 시대가 전개되는 것을 의미한다. 4대 사화 속에서 사림들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림들은 다음 시대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의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면서 훈구파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이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던 훈구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온전히 권력을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사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미암 유희춘이었다. 유희춘은 그동안 함경도 종성에서 긴 유배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선조가 등극하고 얼마 후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6세에 왕위에 오른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적자나 적손이 아닌 방계에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기도 하다. 선조에 대한 평가는 여러 면에서 엇갈리고 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임진왜란과 같은 큰 변란이 일어나 그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
 
선조는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큰 변란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를 비롯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등장 활동하고 성리학을 통한 유학의 장려 등 학문의 진흥에 힘쓴 문치주의를 편 것은 그의 공이라 할 수 있다.
▲ 조선 제 14대 왕 선조의 묘 선조는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큰 변란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를 비롯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등장 활동하고 성리학을 통한 유학의 장려 등 학문의 진흥에 힘쓴 문치주의를 편 것은 그의 공이라 할 수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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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사림들에 대한 복권을 통해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하여 사림 시대를 열게 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선조는 재위 초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증직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의 관직을 추탈하였다.

그리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의 공적을 삭탈하는 등 사림들의 지위를 확립시켜줬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겨 극진히 대우하였다.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고 한다.

선조는 즉위 초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를 섭렵하였다. 유희춘이 경연관으로 선조의 깊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로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 시기 이황과 이이를 비롯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이들이 등장하여 활동하고 성리학을 통한 유학의 장려 등 학문의 진흥에 힘쓴 것은 문치주의의 깃발을 들었던 그의 역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희춘의 관직 복귀와 <미암일기> 저술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유배에서 해배된 1567년 선조가 등극한 해 부터 약 11년간 쓰여진 것으로 16세기 조선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미암박물관>
▲ 유희춘의 <미암일기>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유배에서 해배된 1567년 선조가 등극한 해 부터 약 11년간 쓰여진 것으로 16세기 조선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미암박물관>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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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의 <미암일기>가 쓰여진 것은 1567년부터 1577년까지 약 11년간에 걸친 시기였다. 선조가 등극한 해인 1567년부터 그의 재위 기간에 쓰여졌다. 이처럼 <미암일기>는 사림시대를 연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미암일기>는 선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1567년 7월 명종의 대를 이어 선조가 등극하고 이해 10월 14일 미암은 유배에서 풀려나 경연관으로 차출된다. 관직에 다시 복귀한 것이다. 이날은 미암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암은 이 소식을 부인 송덕봉이 살고 있는 담양을 비롯 고향 해남의 일가에도 알린다. 해남의 성주 김응인은 축하를 보내왔고 여러 가지 선물까지 보낸다.

1567. 10. 14. 해질무렵에 이조(吏曹)의 서리(胥吏)가 12일 전하의 지시를 가지고 왔는데 "유희춘, 노수신, 김난상을 방면해 주고 직첩도 돌려줄 것이며 경연관으로 차출한다"고 했다. 

응인이 그 아들 김흡을 보내와 축하를 했다. 관속을 빌려 좋은 소식을 담양과 남원에 알리고 또 전라도 도사에게도 편지를 보내 해남에도 알리게 했다.

미암이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한 것은 다시 중앙정치의 실세로 등용된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중앙정치에 복귀함으로 인해 그와 연계 되어 있는 인물, 인척들과의 교유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유희춘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해남윤씨는 물론 오랫동안 해남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해남의 성주는 적극적으로 미암을 돕는다. 현실적인 권력 앞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1567. 10. 19. 해남의 경방자가 윤동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내가 안동대도호부사 윤복과 해남누님과 첩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또 성주 김응인 앞으로 청어를 파는 배에다 작은 묘표석 세 개를 실어 순천의 영춘(유희춘의 사촌동생)에게 보내달라고 가지고 왔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해 11월 1일자 발령이었는지 미암은 1일 자신을 해배 시켜준 선조를 알현하기 위해 아침 일찍 궁궐에 출근하여 선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절을 올린다. 그리고 곧바로 경연관으로서의 역할에 임한다.

1567. 11. 초1일. 새벽에 아침밥을 먹고 사은숙배 드리기 위해 대궐에 나아갔다.
1567. 11. 초5일. 아침 강연을 위해 먼동이 밝기 전 의관을 정제하고 궁문 열기를 기다리는데 영경연(領經筵)이 들어왔다.

미암은 유배지에서 성리학에 정진하여 경전에 능하였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여 경연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선조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는다. 선조는 항상 이르기를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했다.
 
미암의 후손들이 <미암일기>의 경연에 관한 사항만 뽑아 만든 것이다. <미암박물관>
▲ 미암의 <경연일기> 미암의 후손들이 <미암일기>의 경연에 관한 사항만 뽑아 만든 것이다. <미암박물관>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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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은 선조 즉위년인 1567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감사,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중 홍문관부제학에는 여덟 번이나 임명되어 선조 초기의 학문연구, 시강참여, 언론형성 등을 주도하였다.

또한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많은 편찬에 참여하고 저술도 남겼다. 홍문관을 이끌면서 <육서부주> <국조유선록> <헌근록> 등을 편찬하였고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간행 보급하도록 건의하는 등 주자학 확산에 힘썼다. 이와 함께 외조부 금남최부의 <금남집>과 <표해록>을 간행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주자학자로서의 면모를 마음껏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의 문치주의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동안 고단한 긴 유배의 시간에서 벗어나 사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희춘은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해남에 지역 기반을 두고 성장하여 사림의 일원이 된 인물이다. 그가 거쳐 온 격랑의 16세기를 보면 사람의 일생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림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시 조정에 등장한 유희춘, 그의 앞에는 전도양양한 일상이 계속 펼쳐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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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저서로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경영' <민속원> 2012년, '녹우당'<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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