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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국회의장이 낙하산부대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1953. 11. 18.).
 신익희 국회의장이 낙하산부대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1953. 11. 1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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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는 국회결의안을 들고 새벽 5시경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남쪽으로 피난한 뒤였다. 국회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서울을 떠난 것이다.

국회로 돌아온 신익희는 전후 사정을 알리고 의원들에게 정부 없는 국회만 남아 있을 수 없으니 정황을 판단, 각자 행동을 취하라 이르고,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노량진을 통해 어렵게 피난길에 올랐다. 28일 오전 대전의 충남도지사 관저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위급한 시국 대책을 논의한 후 저녁에는 〈전국 동포 동지에게 고함〉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유엔 총회에서도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했으며, 우리 국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 태세에 돌입해 있으니, 실지(失地) 회복은 기필코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디 이 어려운 국면을 잘 대처하여 승리의 그 날에 대비합시다. (주석 2)

신익희 의장의 수행비서 신창현의 『신익희의장의 전란일기』에 따르면 그는 전란 초기 피난국회의 업무는 물론 국민의 정신적 무장을 위한 각종 연설회, 부상병 위문, 지방순회, 군부대 방문, 이 대통령과 시국논의, 국방장관 심방 등 하루도 쉬지 않는 일정이 빼곡이 적혀 있다. 
 
1950년 6월 19일 제2대 국회가 개원했다. 제2대 국회는 5월 30일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21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사진은 개원 6일 만에 6.25 전쟁을 맞은 제2대 국회의 피난시절 모습이다.
 1950년 6월 19일 제2대 국회가 개원했다. 제2대 국회는 5월 30일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21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사진은 개원 6일 만에 6.25 전쟁을 맞은 제2대 국회의 피난시절 모습이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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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임시국회가 피난지 대구에서 7월 20일 열렸다. 전란기 그의 심중이 담긴 개회사의 앞 부분을 소개한다.

오늘 우리 국회 제8회 임시국회를 열게 됨에 즈음하여 두어 마디 개회의 식사(式辭)를 드리기로 합니다. 나는 우선 전국민을 대표하여 우리나라의 큰 불행이요, 우리 민족의 대접운(大劫運)인 이번 사변으로 인해 충성 용감하게 전사한 여러 국군 장병과 경찰 동지들의 충렬한 영혼 앞에 삼가 애도의 뜻을 드리고, 수많은 무고한 동포 동지들이 생명과 재산을 희생당하고 유리전패(流離顚沛)하는 데 대하여 또한 무한한 비통애석과 죄송불안을 느끼며, 더욱이 세계평화와 인류 자유를 위해 우리 한국을 원조하다가 신성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사상(死傷) 당한 여러 우리 연합군 전우 장병 여러분에 대해 깊은 애통과 숭고한 경의를 아울러 표하는 바입니다. (주석 3)

유엔군의 참전으로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9월 28일 서울 탈환에 즈음하여 발표한 성명에서 신익희는 "연합군의 인천 상륙 후 우리 수도를 탈환하게 됨은 비록 전반적 군사승리는 아직 획득치 못한 금일에 있어서도 그 정치적 의의가 자못 큰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연합군을 격려하였다.

부산에 머물던 정부가 10월 27일 환도하고 신익희를 비롯 국회의원들도 대부분 환도하였다. 환도 후 정치적 이슈는 이른바 도강파ㆍ잔류파의 문제였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에 남은 시민들을 몰아 적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남침 3일 만에 한강다리를 파괴하여 피난길을 막아놓고 '부역혐의'를 시민들에게 씌운 것이다.
 
1951. 6. 25. 부산, 정부 3부 요인들이 6.25 1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전쟁 전몰장병에게 묵념을 드리고 있다(단상 앞 열에는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이승만 대통령, 김병로 대법원장, 장면 국무총리 등이 서 있다).
 1951. 6. 25. 부산, 정부 3부 요인들이 6.25 1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전쟁 전몰장병에게 묵념을 드리고 있다(단상 앞 열에는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이승만 대통령, 김병로 대법원장, 장면 국무총리 등이 서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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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는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어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민주정치는 책임정치가 아니오? 옛날의 황제도 국난을 당하면 용상에서 내려앉자 수죄(受罪)하는 교서를 내려 민심수습을 하는 법인데,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서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시급한 일이 민심수습이 아닙니까? 대통령께서도 국민들께 사과하셔야 합니다. 저도 곧 국회의장의 이름으로 사과 담화를 내겠습니다."

이 대통령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잘못한 게 뭐 있습네까?" (주석 4)

신익희는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피난하고 있는 동포들은 위선 교통이 정비되는 대로 곧 다같이 고향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고, 역적 도배에게 유린과 고초를 당했던 유주동포(留主同胞)들도 이제는 복견천일(復見天日)하는 자유민이 될 것이니, 동족애로 동지애로써 서로서로 굳세게 뭉쳐서 역적 도배를 철저히 숙청하고, 초토폐허된 처소일망정 우리의 힘으로 또는 유엔의 원조로 하루하루 부흥 재건에 노력하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 가지 곤란한 처지에서 우리 국회와 피난 동포들이 부산시민 여러분에게 많은 폐를 오랫동안 끼친 것을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국회는 이로부터 여전히 계속하여 우리 국민 동포들의 기대에 틀리지 않도록 미력이나마 다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임무상 관계로 우리 피난 동포들보다 한 발 먼저 떠남을 널리 양해할 줄 믿습니다. (『해공 신익희선생 연설집』)


주석
2> 앞의 책, 571쪽.
3> 『제8회 임시국회속기록』, 1950년 7월 27일.
4> 유치송, 앞의 책, 584~58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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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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