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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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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바람이 선선하다. 올 여름도 수월히 난 편이라며 너그럽게 계절을 받아들이게 된다. 푹푹 찌는 더위에 부아가 치솟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여름 더위를 식히는데 가장 덕을 보는 것을 고르라면 '수박'을 꼽겠다. 수박이라니. 겉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가동되는 에어컨도 있고, 짜릿한 서늘함에 정신이 번쩍 드는 계곡도 있는데 수박이라니.

김장성이 쓰고 유리가 그린 <수박이 먹고 싶으면>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선풍기 하나에 온 식구가 오종종 붙어 앉아 밤을 버텼던 시절의 더위도, 바캉스는 서울내기들이나 쓰는 말인 줄 알았던, 하드 바 하나 녹여 먹는 게 호사 중의 호사였던 시절의 더위도 쉬 버틸 수 있었던 게 수박 덕분임을 알게 된다.

기가 막힌 플롯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는 없다. 다만 수박이 먹고 싶으면 해야 하는 것들이 한 장 한 장 펼쳐진다. 수박씨를 심어야하고, 옴질대는 싹눈이 마르지 않게 날마다 촉촉이 물 뿌려야 하고, 아무리 아깝더라도 솎아 내어야 하고, 마디마디 돋는 곁순 똑똑 따 주어야 한다.

그 장면 장면에 우리가 생각하는 잘 익은 수박은 없다. 힘 있게 땅을 디디는 발의 굳은살 배인 뒤꿈치가 있고, 작은 씨앗을 구덩이에 살포시 떨어트리는 주름 깊은 손이 있고, 미숫가루 한 사발 들어 올리는 이의 뒷모습이 있다. 더위를 식혀주는 속 붉은 수박은 언제쯤 나오나. 꽤나 책장을 넘겨도 여전히 지난한 순간이 이어진다.

그렇다. 매 순간 사람의 손길과 마음 씀이 펼쳐진다. 쨍쨍한 하늘과 후드득 떨어지는 비, 밭을 가는 소, 꽃에 달려드는 벌과 나비, 잎사귀 아래 자리 잡은 거미 등 이 모든 천지인의 수고가 모이면, 비로소 영글대로 영근 수박이 '날 잡아 잡수!' 하고 푸른 몸뚱이를 반짝인다.

쩍! 제 몸을 열어 단물이 뚝뚝 듣는 붉은 속살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수박을 먹는 동안만은 거짓말처럼 한여름의 열기가 물러간다. 그 신통함은, 그러함이 마땅한 시절이 만들어낸 당연한 인과이다.

수박을 먹는 동안 뜨거운 열기에 어지러웠던 정신이 한순간 청량해지는 것처럼 이 책을 보는 동안, 지금의 미친 세태에 얼빠졌던 정신이 잠시나마 정돈된다. 집값이 어떠네, 재테크가 어떠네, 일에 매진할수록 뒤처지는 건 아닌지 의심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무엇이 옳은지, 아니 무엇이 부끄러움인지조차 모를 정도이다. 정신이 더위를 먹은 요즘, 무엇이 진정인지 되짚는 순간을 만드는 이 책의 신통함은 김장성·유리 두 작가의 숱한 고민과 묵직한 결행이 만들어낸 마땅한 인과이다.

이 책은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한 대통령의 말에 영감을 받아 기획하였다고 한다. 이 사회가 아름다운 과정을 위해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작가가 몸과 마음을 다해서 만든 책이다.

"일하는 사람과 수고하는 과정을 귀히 여기는 세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데 (중략) 작은 촛불이 되길 희망한다."

마음이 영글대로 영근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에는 그 귀한 열매가 있다.


최선책 : 경기 평택시 고덕면 고덕여염로 20 1706동 1층

0507-1365-4544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안지은씨는 평택에서 '최선책'이라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화성시민신문은 9월부터 추천책을 연재합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김장성 (지은이), 유리 (그림), 이야기꽃(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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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빠진 독 주변에 피는 꽃, 화성시민신문 http://www.hspublic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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