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7 06:57최종 업데이트 21.09.17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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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17일 후보등록, 29일 투개표)가 섣부른 예측을 불허하는 점입가경 양상을 띠고 있다. 스가 총리가 연임하겠다고 선언만 했다면 아무 일 없이 스가 2기 내각이 펼쳐졌을 것인데, 그가 총재 불출마를 선언하는 순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집권여당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자민당 총재가 곧 '일본국 총리대신'이 된다. 총재선거에만 승리한다면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중진 정치인이라면 많이들 노릴 법하지만 의외로 자민당 총재선거는 그다지 흥행하지 않는다. 파벌 때문에 예측이 쉬워서다.

총재 선거 좌우하는 파벌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3일 집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집권 자민당 총재인 그는 오는 29일로 예정된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이달 말 총재 임기 만료에 맞춰 취임 1년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국회 다수당 총재가 총리직을 맡는다. ⓒ 연합뉴스

 
자민당 파벌의 힘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집권 시기 많이 사라졌지만 총재선거에선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수로 존재한다. 파벌은 대개의 경우 영수와 집행부로 구성되며 3선 이하와 4선 이상 중·참의원이 구성원의 절반정도씩을 차지한다. 파벌 상급 집행부가 지지후보를 결정하면 그 후보에게 몰표가 쏟아진다.

2020년 자민당 총재선거가 좋은 예다. 처음에는 스가 요시히데-이시바 시게루-기시다 후미오 중 기시다가 가장 유리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자민당 최대파벌 세이와정책연구회(일명 호소다파, 소속의원 96명)의 실질적 수장인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스가 지지로 마음을 굳히고, 시코우카이(아소파, 소속의원 55명)의 영수인 아소 다로 재무상이 그 의견에 동조하자 압도적인 차이로 스가 후보가 총리로 선출됐다.


당시 <도쿄스캔들> 연재('사의 표명' 아베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어수선한 일본, http://omn.kr/1rfwv)에서도 다뤘지만, 스가 후보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던 유일한 사람은 저널리스트 다하라 소이치로였다.

그는 작년 자민당 총재선거 직전 아베 총리와 단둘이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아베가 "기시다 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정책도 밝고 온건하고 두루두루 무난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은 아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녹차만 마셨다고 한다. 그걸 보고 다하라는 마음속으로 '아! 기시다는 이미 마음을 떠났구나, 그렇다면 스가 관방장관이 총리가 되겠군'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하라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베가 실질적인 영수 자리에 있는 자민당 최대파벌이 기시다가 아닌 스가를 지지하겠다는 뜻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화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상왕'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일본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벌이 자민당 총재선거에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파벌선거 전통 흔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파벌선거가 이번 총재선거에선 깨져 버릴 것으로 보인다. 각 파벌의 지지 후보가 결정되지 않아 기시다 후보의 고치카이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파벌이 사실상 '자유투표'로 임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던 고노 다로 행정개혁 및 백신담당상이 불리해졌다. 이유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 그리고 총재선거 불출마를 표명한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마지막으로 출마 저울질을 하고 있는 노다 세이코 전 총무상 때문이다.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들을 소개하는 NHK 갈무리. 왼쪽부터 고노 다로, 기시다 후미오, 다카이치 사나에, 이시바 시게루, 노다 세이코. ⓒ NHK

 
먼저 다카이치는 스가 총리의 출마 포기 선언이 나오자마자 급부상했다. 본인의 힘이라기보다 '상왕'으로서 여전히 국정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아베 전 총리의 힘이다. 아베는 "그녀를 위해 추천인이 될 것"이라며 "총리로서 적임자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베는 여러 스캔들에 결부돼 있는 상황이지만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의 실권자다. 그가 이 말을 하자마자 다카이치는 추천인 스무 명을 금방 모았다. 참고로 다카이치는 아베와 함께 대표적인 역사수정주의자다.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상과 더불어 자민당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극우파에 속한다.

물론 호소다파 내부에서도 3선 이하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호소다파는 외견상 자유투표를 결정했지만 실제 투표일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어떻게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여기에는 두 번째 이유, 즉 만년 총재후보인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이 출마를 포기하면서 고노 다로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는 점도 포함된다. 이시바는 고노 다로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런 말을 했다.
 
"자민당이 바뀌길 바란다,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의중에 답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이 둘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출마는 포기하지만, 개혁에 대한 의지가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정치이념도 공유된 고노 다로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 <요미우리신문>, 9월 15일자

그의 이 발언이 아베 전 총리의 심경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도쿄스캔들> 시리즈를 통해 누차 밝혔지만, 아베의 유일한 정적이자 라이벌은 이시바 시게루이다. 2012년 자민당 총재선거 1차 투표에서 아쉽게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한 이시바 시게루는 국회의원들의 투개표로 결정되는 2차 결선투표에서 아베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아베는 '이시바 지우기'에 나섰다. 결국 작년 총재선거에서 이시바는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스가에게 참패한다.
 

3일 스가 요시히데 현 총리가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한 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야마구치현 우베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1.9.3 ⓒ 연합뉴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국민적 인기가 높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고노 다로에 이어 항상 2위를 기록할 정도다. 총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고노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하며, 정치이념과 개혁의지를 공유했다고 하는 이시바가 아베 입장에선 달가울 수가 없다. 이는 의원내각제라는 일본정치의 특징이기도 한데, 만약 고노가 총리가 되어 내각을 구성할 경우 공개적인 지지를 해준 이시바에게 주요 각료자리나 관방장관, 혹은 자민당 당3역(간사장, 정조회장, 국대위원장)을 안겨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벚꽃모임 스캔들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아베 입장에서는 그의 라이벌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라도 투표일에 즈음해 자유투표 노선을 폐기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여기엔 아소 다로 재무상의 태도도 한몫 한다. 그는 자기 파벌에서 후보가 나왔음에도(고노 다로는 아소파 소속이다) 전면적인 지지는커녕 파벌 내 고참의원들의 반발을 핑계 삼아 자유투표로 노선을 정했다. 기시다 후미오가 영수로 있는 고치카이에서 분열돼 나온 다니가키그룹(유린카이)이 15일 기시다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과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참고로 자기 파벌 소속의원이 총재선거에 출마했는데 일치단결하지 않는 것은 자민당 역사상 전례가 없다.

고노 다로가 가장 유력하지만...

마지막으로 아직 결정되진 않았지만 노다 세이코 간사장 대행의 출마여부다. 만약 그가 출마할 경우 중참의원은 모르겠지만 일반당원의 고노 다로 표를 상당히 빼앗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지층이 겹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념적 스펙트럼 상 고노 다로와 노다 세이코가 무슨 접점이 있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좌우의 이념보다 둘 다 개혁적 성향으로 유명하고, 여성지지층도 겹친다. 세대교체를 원하는 당원들에게 우유부단한 이미지의 기시다보단 고노가 더 유력했는데 노다가 나와 버리면 이 표도 갈릴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네 명의 후보 중 아무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마저 발생한다.

그렇다면 자민당 당규에 따라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 2위가 2차 결선투표를 진행해야 하는데, 문제는 2차 결선투표는 국회의원 표로만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카이치가 1차에서 떨어질 경우, 호소다파는 자기 파벌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기시다 후보를 2차 결선투표에서 일치단결해 밀어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지난 1년여간 여론조사 지지율 5%대에 불과한 기시다 후보(총재 입후보를 공식화 한 이후 실시한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19%로 나왔지만)가 어부지리로 총리가 될 수도 있다.
 

고노 다로 일본 행정개혁장관. ⓒ EPA=연합뉴스

 
물론 여전히 2주라는 시간이 남아있고, 고노 다로가 최유력 후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자민당 내에서도 3선 이하로 구성된 의원 90명이 파벌을 초월해 자민당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으로 "당풍일신(党風一新) 모임"을 만들었다. 당풍일신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 이들은 기시다 보다 고노 다로를 지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튼 이번 총재선거는 아무 특색 없이 미미하게 끝날 것 같더니만 막판에 와서 매우 생동감 있게 전개되고 있다. 누가 되든 세대교체 바람은 확실히 불 것 같다. 이른바 자민당 사대천왕으로 근 10여 년간 군림해온 아베, 아소, 스가, 니카이의 퇴장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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