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기사 수정 : 15일 오전 11시 31분]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가기허다수익(可期許多收益), 불가기재견군안(不可期再見君顔)"

101년 전 오늘(9월 14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터트린 부산 출신 박재혁 의사가 의거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 있는 동지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엽서 내용 중 일부다. "많은 수익은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대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라는 뜻이다.

일견 연애편지처럼 보이는 이 엽서는 스물여섯 청년 박재혁이, 거사를 앞두고 의열단 동지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유서와 같은 편지로 활용됐다. 실제로 이 엽서가 동료들에게 전달된 뒤, 박재혁은 '수익은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의 말처럼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에 성공한다. 1919년 11월 중국 지린에서 의열단이 창립된 이래 처음으로 성공한 의거였다. 

그러나 박재혁은 죽음마저도, 자신이 남긴 말처럼 실행하고 떠나버렸다. 그는 의열단 동지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이듬해 5월 대구 감옥에서 사망한다. 사형이 확정된 상황에서 박재혁은 "왜놈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 없다. 내 생명은 내가 끊는다"며 단식을 선택, 1921년 5월 11일 순국한다.  

일제는 의열단원 박재혁이 단식으로 순국한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될 수 있다며 폐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처럼 발표했다. 당시 신문들도 일제의 의도대로 박재혁은 폐병에 의한 병사로 보도했다. 

"박 동지... 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되오"
 
 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보기

 
박재혁,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이 소년은 1895년 5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왜관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했다.

박재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재를 싱가포르까지 확대한다. 그는 상하이와 싱가포르, 부산을 오가며 인삼 중개 무역을 진행했다. 100년 전 이미 국제무역상으로 활약했던 박재혁이 얼마나 뛰어난 상재를 지녔는지, 그의 일본어와 중국어가 얼마나 유창했는지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놓쳐선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박재혁은 이미 부산진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독립운동에 눈을 떠 활동해 왔다. 1907년 열두 살 아이에 불과했던 박재혁은 친구 최천택과 김영주, 백용수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한다. 부산공립상업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구세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동국역사 배포 사건' 등을 주도한다. 국제무역상으로 이름을 날린 박재혁이 1920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의열단 의백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원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던 일.

의열단은 경남 밀양 출신 약산 김원봉이 1919년 11월 중국 지린에서 설립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다.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천한다'는 뜻 아래 7가살, 5파괴를 목표로 삼았다. 7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 타이완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토호 등이다. 5파괴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주요 기관이다. 

그러나 수개월을 준비한 국내 진입 암살파괴 계획은 밀정과 일본 경찰에 의해 거사를 진행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만다. 의거를 준비했던 의열단원 수십 명이 대대적으로 검거됐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특히 일제 부산경찰에 의해 체포된 의열단 단원들의 고초가 매우 컸다.

이에 약산 김원봉은 싱가포르에 머물던 박재혁에게 전보를 쳐 '상하이에서 만남을 갖자'고 연락한다. 의열단 공약 10조 중에는 '초회에 필응할 것'이 명시됐다. 전보를 받은 박재혁은 곧바로 상하이에 돌아왔다. 박재혁을 만난 약산 김원봉은 말한다. 

"동지들의 복수를 위해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약산 김원봉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박재혁에게 다소 무리한 요청을 한다.

"(서장을) 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되어. 제가(스스로) 누구 손에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알도록 단단히 수죄를 한 다음에 죽여야 하오."

의열단 명령을 받은 박재혁은 이를 수행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자산을 정리해 중국 고서상으로 위장한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가 중국 고서를 좋아한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 완벽하게 산동의 고서상 차림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그 길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한 '가기허다수익'이면 '불가기재견군안'도 이즈음 배편에서 박재혁이 상하이에 있는 동지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엽서 내용이다. 

1920년 9월 어렵게 부산에 도착한 박재혁은 의열단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부산경찰서로 향한다. 어려움 없이 서장 면담을 득한 박재혁은 안내를 받고 부산경찰서 2층에서 서장을 만난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장과 마주한 박재혁은 상하이에서 구입한 고서를 건넨다. 봇짐에서 이런저런 고서를 꺼내 건네던 박재혁은 마침내 의열단의 성명이 적힌 전단을 보이며, 유창한 일본어로 서장을 향해 외친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의 소행으로 우리 동지들이 모두 구속돼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네놈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다. 죽어 마땅한 줄 알고 있을 거다."

말을 마친 박재혁은 봇짐 바닥에 몰래 숨겨온 폭탄을 꺼내 탁자 한가운데 두고 바로 터트린다. 박재혁과 하시모토 사이의 거리는 두 척에 불과했다. 이 폭발로 하시모토는 큰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근처에 있던 일본경찰 2인도 큰 부상을 당한다. 박재혁 역시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은 이듬해 단식을 통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공동묘지에 묻혔던 박재혁... 1969년 현충원에 잠들다
 
 부산시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박재혁 동상.
 부산시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박재혁 동상.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1921년 5월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박재혁은 자신의 고향 부산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우리 정부는 박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7년 뒤인 1969년 10월 정부는 박 의사의 유해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76번 무덤에 모셨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박 의사의 행적은 의열투쟁을 진행했던 다른 의사들에 비해 덜 알려졌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박 의사가 우리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소외됐던 의열단 출신이라는 점,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해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 부산 등 박 의사 활동지역에서 박 의사의 행적 등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박 의사의 후손인 김경은(종손녀/여동생 손녀)씨도 1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부산 개성고(옛 부산상고) 총동창회 비롯해 많은 분들이 애써주고 있는 것이 맞지만 여전히 고향인 부산에서도 박 의사를 제대로 선양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며 "2020년 박 의사 의거 100주년이 돼서야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시민들의 요구에 맞춰 부산에서도 좀 더 나서서 기억하고 알렸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드러냈다.

2019년 12월 부산 중구청은 2020년 박재혁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부산경찰서가 위치했던 거리에 박재혁 의사 의거 안내판을 설치했다. 앞서 박 의사 동상은 1998년 롯데그룹 후원으로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 입구에서 1.6km 떨어진 수변공원 안에 세워졌다.

의열단은 박 의사 의거 성공을 기점으로 1920년 12월 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1921년 9월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의 상하이 황포탄 의거, 1923년 1월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1923년 김시현, 황옥의 2차 대암살 파괴계획, 1924년 1월 김지섭 도쿄 이중교 폭탄 의거, 1925년 3월 베이징 밀정 김달하 처단 사건, 1926년 12월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을 습격 의거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의거를 끊임없이 일으켰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