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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 '피시대학'을 시작으로,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 전반이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라고 지칭되며 확산되고 있다. 가령, 중년 남성들의 산행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서 일부 희화화하는 형태의 <한사랑산악회>가 거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며칠 전에는 SNL 코리아에서 <인턴 기자>라는 영상을 만들면서, 20대 여성의 미숙한 프레젠테이션을 하이퍼 리얼리즘 형식으로 재현했는데, 이 또한 청년 세대 사이에서 가히 장안의 화두가 되고 있다. 청년들은 대학 신입생 시절 발표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민망함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세상에 이보다 더 웃긴 영상은 본 적 없다면서 거의 남녀 커뮤니티와 SNS를 가릴 것 없이 온 인터넷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이런 하이퍼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유머 장르는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소설 또는 영화, 그 밖의 거의 모든 콘텐츠는 '재현'을 기반에 두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재현적인 기법은 헤밍웨이나 샐린저를 비롯한 영미 단편 소설들, 그밖의 각종 희극의 일반적인 기법이었다. 근래에는 기존의 공영 방송 틀 안에서 '억지 웃음'을 짜내던 개그 프로그램들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폐지되고, 1인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그야말로 자유로운 재현, 개그, 유머 문화가 폭발하듯 터지고 있다. 그 특징은 대부분 '리얼'과 관련되어 있다.

<가짜 사나이> 같은 여러 유튜브 예능 또한 일종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공중파 예능에서 각종 리얼리티쇼, 관찰 예능으로 '리얼'을 좇긴 했지만, 유튜브 등에서 확산되는 최근의 '리얼'에 비하면 거의 연기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건 리얼을 넘어선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개그 장르인데, 그 기법이랄 것은 거의 특별할 게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이다. 리얼을 연기로 보여줄 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연기된 리얼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인생이라는 건 대개 희극적이다. 아무리 내가 진지한 척 하면서 살아가더라도, 내 일상의 곳곳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 재현하면, 이상하게 웃길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우리가 우리 삶을 구경하면, 그것은 웃긴 것이 된다. 점잖은 척 회사에 출근해서 사람들과 호탕하게 인사하고,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고, 점심을 먹으러 가며 날씨 이야기나 하고, 지하철에서 죄다 거북목으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집에 와서 홀딱 벗고 누워 있다가 자는 모습만 그대로 재현해도, 일종의 블랙 코미디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리얼해질수록 웃기다. 일상일 때는 모르지만, 그것이 연기가 되면, 비로소 웃기다는 걸 깨닫게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바로 이런 '웃음'과 필사적으로 싸운 수도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무리 근엄한 종교의식이나 성직자도 재현되면 우습게 보인다. 그렇기에 소설 속 수도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희극)'으로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쓴 기록을 지우려 했다. 실제로 '피식대학'에서는 교회에서의 간증 장면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는데, 사람들로부터 너무 웃기다며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정치인의 연설이든, 청년의 발표든, 중년 남성의 등산이든, 중년 여성의 수다 자리든 무엇이든 그대로 재현되면 웃기다. 우리가 우리 삶의 '구경꾼'이 되는 순간, 우리는 웃음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하이퍼 리얼리즘의 유행은 우리 시대의 '구경꾼' 문화 대유행의 연장선에서도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게 구경이 된 시대에서, 우리 일상 또한 더 적극적으로 더 리얼한 '구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품평하고 조롱하고 깔깔댄다. 댓글이나 실시간 채팅장은 그야말로 '비웃음'의 어마어마한 범람을 이룬다. 노인이건 아재건 아줌마건 청년이건 어린이건 모조리 다 깔깔댐의 대상이다. 사실 그런 '깔깔댐' 자체를 당연히 나쁜 것이라 단정하긴 어렵다. 오히려 그런 웃음은 우리가 삶 자체를 확인하고 추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 속에는 깔깔댐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때도 있다. 가령, 틀딱충, 맘충, 개독교 같은 말들이 거론되면서 특정 집단에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과 혐오의 대상으로 확정지으며 확산시키는 순간이다. 그렇게 단순히 현실과 유사한 재현에 웃고 즐기던 것이 어느 순간 혐오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는 언제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무렇지 않은 웃음들이 어느 순간에는 사람들 사이에 편견으로 자리잡고, 타인들을 프레임화시키는 거대한 혐오의 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모든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는 위험이기도 하지만, 하이퍼 리얼리즘에서 유독 주의해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소위 하이퍼 리얼리즘에서 핵심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며, 이를 시청하는 이들 또한 어느 순간 무엇이 웃음이고 현실인지, 무엇이 혐오이고 즐거움인지 헷갈리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청자가 직접 댓글을 달고, 영상을 퍼 나르고, 평가하며 확산시키는 문화에서는 구경꾼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어떤 프레임들이 매우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게 프레임이 극대화되면 그것은 때론 현실이 된다. 이미 우리는 현실이 가상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가상이 현실을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재현의 웃음은 어느 순간 비웃음이 되고, 그것이 현실의 조롱과 혐오로 넘어올 가능성 또한 언제나 존재한다. 

덧붙이는 글 |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facebook.com/writerji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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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너는 나의 시절이다>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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