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언니들 진심이다! 

축구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30년이 가까워지지만, 직접 해보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십대에도 경기장은 직접 뛰기엔 너무 넓었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에 맞았던 트라우마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공은 무서웠지만, 축구는 평생의 사랑을 보낼 수 있는 대상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골대 뒤의 응원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티브이에서는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였지만, 직접 하고 싶은 마음에 질투가 나서 일부러 보지 않았다. 

이십 대에 축구를 하겠다는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운 동기들 사이에서도 뛰어봤지만 경기는 무리였고, (변명이지만) 부족한 실력으로 끼어들만한 여자 축구팀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축구팀을 찾아다니는 것도 잠시, 일상의 분주함이 신속하게 삶을 잠식했고 20년이 넘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섯 번의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나는 계속 축구장 골대 뒤, 거기에 있었다. 여전히, 나는 직접 공을 차고 싶었다. 한 번 자라 버린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0년 전에 할 걸 그랬어요. 스무 살 때도 못 뛰었는데, 지금 뛰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제가 팔로우하는 여자축구팀이 있는데, 한 번 가보실래요?"
"어딘데요? 나이 오십인 초보자도 끼워줄까요?"
"어른들도 계시더라고요. 한 번 가봐요!"


축구를 좋아하는 동네 친구에게 축구하고 싶다며 하소연했더니, 근처에 있는 여자축구팀의 정보를 알려준다. 친구가 보여주는 포스팅을 살펴보니, 연령대도 다양하고 기초부터 배울 수 있다고 안내가 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신입회원 모집 공고에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답변이 바로 오지 않으니 이런저런 걱정이 꿈틀대며 자라났다. 역시 나이가 너무 많은가? 초보라서 자격이 안 되나? 하는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을 즈음 반가운 답신이 왔다. 

'환영합니다! 연락처 주시면, 모임 안내 메시지를 드리겠습니다.'

야호! 축구팀에 가입해도 좋다는 답변을 받고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부랴부랴 집 근처의 스포츠용품점에서 축구화를 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축구화를 고르는 것은 쉽지 않았고, 초보에겐 축구화보다는 풋살화가 더 낫겠다는 조언을 받고서야,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빨간색의 풋살화를 챙겨왔다.

스무해가 넘도록 열심히 응원만 했지, 축구용품이나 준비물은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첫 모임은 금요일이었다. 회사를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모임 시간인 8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축구팬으로 3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나의 자리는 항상 축구장의 골대 뒤였다. 이제, 이십 년 만에 축구하고 싶다,는 꿈을 이뤘고, 내게는 생애 처음으로 축구화가 생겼다. 아니지, 이 아이는 풋살화이니, 조만간 스파이크 제대로 박힌 축구화를 장만하련다.
▲ 내 인생의 첫 축구/풋살화 축구팬으로 3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나의 자리는 항상 축구장의 골대 뒤였다. 이제, 이십 년 만에 축구하고 싶다,는 꿈을 이뤘고, 내게는 생애 처음으로 축구화가 생겼다. 아니지, 이 아이는 풋살화이니, 조만간 스파이크 제대로 박힌 축구화를 장만하련다.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오늘 모임은 우천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뵐게요."

가을장마라더니, 포항은 벌써 몇 주째 해를 보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아쉽지만 첫 모임은 화요일로 미뤄졌다. 두근거림에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마침내' 화요일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신입회원 이창희입니다!"
"반가워요. 잘 오셨어요!"


화요일마다 운동을 하는 풋살장에는 열다섯 명 정도의 선배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계속 연락을 주시던 회장님의 소개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초보자의 특권으로 감독님께 인사이드 킥을 배웠다. 

"몸에 힘을 빼고, 무릎 관절을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해요. 발 안쪽으로 공의 중심을 차는 거예요. 기본기가 제일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해보세요."

역시나 몸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어찌나 몸에 힘이 들어가는지 쓰지도 않는 팔까지 저려왔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씨였지만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곁눈질로 살펴본 선배들은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발등으로 공을 올리는 리프팅은 가뿐했고, 둘이서 짝을 지어 볼 트래핑과 패스 훈련까지 다양한 동작을 연습했다. 감독님을 초보인 내가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두리번거렸더니, 어느새 시원시원한 목소리의 코치님이 오셔서 훈련을 담당하고 계셨다. 제대로 된 축구팀의 훈련이었다. 

"삑!"

코치님의 휘슬 소리에 이어진 것은 드리블로 공을 몰고 가서는 슛을 하는 연습이었다. 눈으로는 이미 30년째 드리블도 킥도 할 만큼 한 응원 전문 축구인은, 마음은 이미 전성기의 메시인데 실전은 오늘이 1일인 생초보다. 역시, 현실과 이상은 멀고도 험하다.

골대 뒤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던 플레이였지만, 피치에 올라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공의 속도는 둘째 치고, 제대로 공의 중심을 맞추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게다가 선수들한테 '제대로 안 뛴다'며 호통을 쳤던 응원의 시간이 부끄럽게,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힘들다며 헉헉거렸다. 
 
첫 모임에서 한 시간 정도의 훈련을 마친 선배들은, 세 개로 팀을 나누더니 곧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심장은 미친듯이 쿵쿵거렸지만, 비오는 경기장을 뛰는 느낌은 행복이었다. 아, 나는 자유다! 그리고, 선배들은, 너무 멋지다!
▲ 첫날부터 5 대 5 풋살경기 중 첫 모임에서 한 시간 정도의 훈련을 마친 선배들은, 세 개로 팀을 나누더니 곧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심장은 미친듯이 쿵쿵거렸지만, 비오는 경기장을 뛰는 느낌은 행복이었다. 아, 나는 자유다! 그리고, 선배들은, 너무 멋지다!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자, 이제 5 대 5로 경기합니다!"

헉!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시 코치님의 휘슬이 울렸고, 팀을 나눠서 경기를 하잔다. '저 오늘 왔는데, 바로 경기를 뛰냐'고 묻자마자 '당연하다'며 파란색 조끼를 건네주셨다. 팀은 세 개로 나뉘었고, 15분을 뛰고 나면 이긴 팀에게는 휴식이 진 팀에게는 다음 팀과의 경기가 숙제로 주어졌다.

축구장보다는 작은 풋살구장이었지만, 상대 선수를 쫓아 전력으로 뛰고 나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제대로 뛰지도 못한 채, 헉헉대며 경기장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이 휘슬과 함께 멈췄다. 끝났구나, 다행이다!

처음 나간 모임은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고, 이십 년이 넘게 기대했던 '축구하는 순간'은 쿵쾅대는 심장소리를 남겼다. 이렇게 스무 해를 돌아 헤매던 꿈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두 시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축구를 즐기기 위해 함께 뛰었던 선배들과의 시간은 비현실적일 만큼 사실적이었다. 나이도 직업도 다양한 여자들은 축구를 위해 온전히 함께였고, 그 모든 순간 '진심'이었다.

그들은 티브이의 유명 프로그램의 인기에 휩쓸려 그들을 흉내 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시간 동안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을 용기 내어 '실행'한 것이었다. 축구가 주는 즐거움은 남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었을 텐데, 지금껏 금지되었던 것처럼 빗장이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선배들이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들은 축구라는 경기 안에서 완전한 자유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한 번의 풋살과 한 번의 축구 경기를 끝냈다. 부족한 실력은 민망할 뿐이고 금요일의 경기 후 무거워진 다리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나는 벌써 다음 모임을 기다린다. 아직은 패스도, 드리블도, 슛도 엉망이지만, 일단 경기장을 쉼 없이 뛰어다닐 심장이 먼저다. 축구에 진심인 선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말이다.

스무 해도 넘게 꿈만 꾼 시간이 돌고 돌아 내 것이 되었으니, 나도 피치에서 진심인 그녀들과 함께 마음껏 자유로워지련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 길을 먼저 닦아놓으신 용감한 축구팀 선배님들이 너무도 감사하다. 하고 싶은 것을 금지하지 않고 용감하게 선택한 선배들 덕분에, 우울했던 나의 삶마저 갑자기 밝아진 느낌이다. 이거, 너무 좋은데! 우리, 같이 차실래요?
 
인생 첫 축구경기에서 나의 포지션은 ‘엉망진창’의 미드필더였다. 뒤에서 선배들이 가르쳐주는대로 상대 선수를 쫓아다녔을 뿐, 완전한 구멍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슛, 패스, 드리블이 아니다. 일단, 체력훈련을 먼저해야겠다.
▲ 두 번째 경기는 70대 남자축구팀과의 경기 인생 첫 축구경기에서 나의 포지션은 ‘엉망진창’의 미드필더였다. 뒤에서 선배들이 가르쳐주는대로 상대 선수를 쫓아다녔을 뿐, 완전한 구멍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슛, 패스, 드리블이 아니다. 일단, 체력훈련을 먼저해야겠다.
ⓒ 이창희

관련사진보기


태그:#일상비틀기, #축구하는 여자들, #연일FC, #이십년동안의 꿈, #골 때리는 그녀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