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석 연휴를 2주가량 앞둔 14일 광주 북구 영락공원묘지에서 효령동 주민이 벌초하고 있다.
 지난 2020년 추석을 앞두고 광주 북구 영락공원묘지에서 효령동 주민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사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엄마, 이번에도 벌초해야지?"
"해야지..."
"그거 내가 할게요. 친구들 데리고 하고 올게요. 그래도 되지?"
"그렇게 하면 좋지. 할 수 있겠어?"


증조할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얼굴도 못 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남편의 항암치료는 2주 간격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퇴원하고 간신히 후유증을 가라앉히면 다시 입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는 추석, 추석 걱정보다 먼저 앞서는 벌초 걱정은 나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진작부터 남편은 벌초 가야 한다며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고, 속초의 시누이는 자신이 농협에 벌초 대행을 의뢰하겠다며 주소를 물어왔다. 시골 촌구석 여러 장의 산소가 뒤섞인 곳의 주소가 명확할 수 없었다. 주소가 명확하지 않으니 맡기기도 어려웠다. 먼저 챙겨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가서 이곳이라고 짚어 주느니 차라리 이전처럼 아이들 데리고 가서 하고 오는 것이 낫겠다고 남편은 생각을 정리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나서서 벌초를 하겠다고 아들이 나선 것이었다. 말은 기특했지만 덥석 반기지는 않았다. 같이 갈 때는 오가는 길 차 안에서 늘 잠들어 있었기에 목적지까지 찾아가는 것부터 걱정되었다. 친구들을 데리고 간다고 하니 친구들이 내 집의 일처럼 잘해줄까 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자유로운 영혼인 요즘 세대의 아이들이 친구 집의 벌초를 함께 해주겠다는 마음은 넘치게 고마웠지만, 잘 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네 식구가 모두 가도 파김치가 되어야 끝나는 일이었다. 힘든 일이라고는 해보지 않았을 아이들이라 생각했고, 잡목이 밀림처럼 무성하게 자란 산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겁할 상황이 눈에 그려졌다. 그런 산소에서 벌초를 얼마나 깔끔하게 할 수 있을지도, 책임감 때문에 아들 혼자 애쓰다 친구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도 마음이 쓰였다.

영상통화로 확인까지... 아들의 첫 벌초 

벌초 당일에 말벌과 더위에 대한 대비, 여분의 옷과 수분을 보충할 물까지 챙기고 거듭 안전을 당부하며 아이들을 배웅했다. 오후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이 되어서야 아이들은 산소에 도착했다고 했고 5시간 동안 벌초를 했다. 

산소마다 마무리하기 직전 영상통화로 이 정도면 되겠냐고 물어왔고 충분하다고 답을 듣고는 차례로 일을 끝마쳤다. 깔끔히 정리된 산소의 사진을 보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저녁을 먹고 출발하겠다는 말까지 듣고 나서야 비로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했고 마음은 묘하게 울렁거렸다.

출발은 셋이서 했는데 산소에 둘이 더 왔다고 했다. 각자의 일정이 있었지만 친구의 일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그리로 모여들었고 덕분에 수월하게 마무리했다고 들었다. 궂은일에도 머뭇거리지 않는 아이들의 끈끈한 우정과 연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들 나이 즈음에 우리가 했던 일을 떠올렸다. 결혼을 했고 큰아이를 막 낳았을 때였다. 아버님 산소를 산 중턱에서 끄트머리 산자락으로 옮겨온 것도 그때였다. 이장한다고 친지들을 불러 모았고 잔치하듯 음식을 준비했다. 물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 옆에서 과정을 살필 뿐이었고 마음만 어수선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벌초가 우리의 몫이 되었던 것 같다. 말은 간단하게 묘지 3장이지만 남편 혼자서든 나와 둘이서든 벅찬 분량이었다. 예초기를 짊어지고 겁 없이 무작정 덤볐고 갈고리를 들고 나뭇잎을 긁었다. 열심히 산소를 다듬고 나면 준비한 술과 과일과 포를 놓고 예도 올렸다. 가족의 안녕을 지켜봐 주길 막연히 빌었고 가족에게 지극했던 당신의 과거를 추억하는 이야기들을 따라 아련해졌던 시간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들이 그 일을 대신한 것을 생각하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책임이 고스란히 아들에게 전가되는 것 같아서 그도 씁쓸했다. 자손의 도리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정리되는 시절이 지금은 아니었다. 수고로운 희생이 요구되는 유교적 가치를 지키라고 절대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길 바라지만

심리학에서는 어린 자녀지만 부모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말한다고 한다. 부모화가 높은 자녀일수록 책임감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존 보울비(John Bowlby)는 이를 '역전된 부모-자녀관계'라고 표현했다. 이제 시작인가 싶어 조금 우울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인 제사나 벌초 등 장손으로서의 도리나 가치관, 태도와 습관들이 아이에게 각인되어 아이의 삶과 이번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심리학자 로스 파크가 말한 이른바 '아버지 효과(Father effects)'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아빠의 암투병이 아들에게 부지불식 중 "지나친 자기희생이나 강박적 배려의 문제"(이우경, <아버지의 딸> 중)로 표출된 것은 아니길 바랐다. 아이들에게 짐으로 느껴지는 것은 절대 원하지 않는 바였다. 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커서 오히려 강박적으로 아들의 수고로움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이 복잡한 생각을 하게 했다.

장손의 책임은 여전한지 몰라도 권리 부분에서는 아들과 딸을 구분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순국선열 유족과 애국지사의 가족 및 유족, 그리고 독립유공자의 장손에 대한 취업 지원 내용에서, 독립유공자의 '장손'을 '장남의 장남'으로만 보는 것은 차별이라고 인권위는 2019년에 이미 결정했다. "장손의 개념을 기존 호주제에 근거한 호주승계인, 남성으로 한정하는 것은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로서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손자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여러 친지들에게 자랑했다. 소식을 듣고 건너 건너 내게 들려오는 아들에 대한 칭찬이 무작정 반갑지만은 않았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책임을 갖게 되었듯이 아들과 딸도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고 책임을 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상황이 어려웠던 올해였기에 벌초라는 무거운 짐을 일단 내려놓았다는 것이 개운했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