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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그룹 '대체왜하니?'는 초4에서 중3까지 10대 사춘기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엄마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편집자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TV를 시청하는 건 다 옛말이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TV를 시청하는 건 다 옛말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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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에 살지만, 방송은 다 따로 봅니다 
 

우리 집은 방송이 밥을 먹여 준다. 남편은 방송 제작 일을 하고 나는 방송 글을 써서 돈을 벌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방송을 볼 때 뭔가 심도 있고 분석적으로 시청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넷 다 아무 생각 없이 방송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참 좋아한다. 

가족이 하나같이 방송을 좋아하지만 보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나는 본방 사수파, 남편은 OTT파, 아이들은 유튜브파로 나뉜다. 온 가족이 티브이 앞에 나란히 앉아 시청하는 일은 거의 없다. 꼭 보다가 누구 하나는 "나는 내 휴대전화로 볼게" 하는 말이 나오곤 한다. 

감상적인 입장에선 못내 섭섭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고 물리적인 조건이 갖춰진 이 시대가 참 편리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부모님이 뉴스를 보고 있으면 다른 채널의 만화 영화가 보고 싶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겪어온 나로서는 지금의 아이들이 내심 부럽다. 라떼는 TV 한 대, 채널은 단 세 개였다.

나는 안방 침대 안쪽에서 드라마를 보고, 남편은 침대 바깥쪽에서 해외 예능을 본다. 큰 아이는 거실에서 스포츠를 보고, 딸애는 제 방에서 유튜브를 본다. 목이 마르면 휴대전화를 쥐고 주방으로 걸어가면서도 보고, 물을 마시면서도 볼 수 있다. 자신의 구역을 침범받지 않고 싶어 하는 맹수들처럼 우리는 각자의 구역에서 각자의 스타일대로 콘텐츠를 즐긴다. 

상황이 이러니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취향 접점 프로그램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대체 왜 하니?' 같은 의문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이처럼 가족 내 콘텐츠 개인주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의 신(新)문화 현상은 죄다 유튜브 속에 있는 것 같은데 다들 자신이 좋아하는 영상 채널에만 관심이 있지 서로가 무엇을 보는지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준 반가운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무한도전, 지붕 뚫고 하이킥, 순풍 산부인과 같은 탑골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과거의 인기 방송들이다. 라떼라는 말만 들어도 딴청을 피우는 아이들이 라떼 예능에 대해 같이 얘기 나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이 프로그램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실제로 무한도전은 3년 전, 지붕 뚫고 하이킥과 순풍 산부인과는 11년 전에 종영된 프로그램이다. 

1~2년 사이에도 세대차가 확확 난다는 요즘 아이들... 탑골 이야기로 치부되는 옛날 프로그램이 어떻게 아이들과 통하게 된 것일까? 아이의 주변 친구들도 모두 해당 프로를 알고 재밌다는 반응인 걸 보니 우리 아이들만의 독특한 취향 탓은 아닌 것 같다. 콘텐츠 탈개인주의를 꿈꾸며 나는 아이들을 면밀히 관찰해나가기 시작했다. 

'나문희 호박고구마 짤'을 찾아보는 아이들 
 
유튜브 채널 '빽능'에 올라온 순풍 산부인과 클립들. 빽능은 SBS의 과거 예능 전용 채널이다.
 유튜브 채널 "빽능"에 올라온 순풍 산부인과 클립들. 빽능은 SBS의 과거 예능 전용 채널이다.
ⓒ 빽능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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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 프로그램들을 유튜브를 통해서 알게 됐다. "무한도전 예언서", "미달이 레전드짤', '나문희 호박고구마 짤' 같은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짧게 편집된 영상을 보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하는 것을 보게 됐고 이를 계기로 애청자로 이어지게 됐다.

특히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현재도 인기리에 활동하는 이들이라 큰 이질감은 느끼지 못했다. 어찌 보면 어른인 우리에겐 한 때 인기 있던 프로그램이지만, 아이들에겐 새로운 콘텐츠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작은 휴대전화 모니터로 무슨 재미 인지도 모를 콘텐츠를 보는 것보다는 한때 나도 열광했던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하며 공감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부모로서 좋았다. 

"미달이가 방학숙제 미뤄서 전날 부랴부랴 했던 것 생각나?"
"아~~ 온 가족이 숙제 돕느라 난리 났던 거?" 
"우리도 그렇게 안 되려면 미리미리 숙제를 해야겠지?" 


방송에 나온 에피소드를 일상과 연결 지으며 아이들과 공감대를 쌓아나갔다. 사실 온 가족이 티브이를 함께 보는 것만큼 쉽게 가족의 유대감을 쌓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보며 함께 박장대소하던 장면이 나의 기억 속, 따뜻한 가족의 한 장면으로 남은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는 이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보편적인 공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세대를 구분 짓지 않고 시대를 아우르는 웃음과 캐릭터들이 그 안에 있다. 때문에 현세대의 아이들도 큰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보편적인 공감'의 프로그램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나가 잘 되면 따라 하는 식으로 모두 비슷비슷한 설정의 프로그램들만 눈에 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시대변화에 따라 존립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실제로 평일 저녁 7시와 9시 사이에 방영되던 시트콤이 더 이상 제작되지 않는 이유는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저녁과 야식을 먹으며 시트콤 보던 시대가 지나버려서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다. 하긴, 우리 집만 해도 그 시간엔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숙제를 하느라 바쁘고, 또 같이 본다 한들 중간쯤, 하나 둘... 자신의 기호에 맞는 프로를 찾아 자리를 뜰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와 함께 볼 수 있고 얘기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은 귀하고 소중하다. 단순히 같은 프로그램을 본다는 기쁨만이 아니라, 서로를 공감하고,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한 집에 살아도 각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집에 살아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시트콤도 꼭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과 남은 회차의 무한도전을 볼까 한다. 티브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 같이 깔깔깔 웃으며, 서로의 입에 과자도 넣어주고, 다음 장면을 예측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좁은 소파에 우겨 앉은 엉덩이 거리만큼 가족 간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초4에서 중3까지 10대 사춘기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엄마 시민기자들의 콘텐츠
태그:#라떼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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