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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낙원 여사와 그의 맏손자인 김인이 어렸을 적함께 찍은 사진.
 곽낙원 여사와 그의 맏손자인 김인이 어렸을 적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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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상을 차릴 돈을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겠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의 생신이었다. 청년 동지들이 생일잔치를 준비하는 것을 알아차린 곽낙원 여사는 "그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기꺼이 모은 돈을 드렸다. 하지만 생일상을 차리지 않았다. 대신 독립운동에 쓰라며 권총 두 자루를 사 청년 동지들에게 건넸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들을 돌볼 때 일화다. 그는 자신의 팔순 때는 잔치 대신 일본과 싸우라며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붓으로 싸우라는 의미였다.

수감된 아들에게 "경기감사 한 것보다 기쁘다"

백범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의 고향은 황해도다. 아들 김구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삼경>을 가르치며 출세를 꿈꾸도록 했다. 하지만 김구는 반일 감정을 키웠다. 1896년에는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기 위해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스치기(土田壤亮)를 살해했다. 이 일로 아들이 감옥에 갇히자 곽 여사는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김구는 또다시 15년 형을 받았다. 아들을 옥바라지하던 어머니도 항일의식이 커졌다. 

<백범일지>에는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와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소개한다. 또 1915년 4년 만에 출옥한 백범을 위해 친구들이 위로연을 열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키자 어머니가 대노해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1922년에는 김구가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자 곽낙원은 아들을 따라 망명했다. 이후 며느리(최준례 여사)가 일찍 병사하자 손자 둘을 거두며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최준례 여사는 차남 김신을 낳은 후 폐렴에 걸려 고생하다 이역 땅인 상해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동아일보>(1925년 11월 6일)의 "죽어도 고국 강산" 제목의 기사에는 곽낙원 여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약 4년 전에는 황해도 신천군을 떠나 며느리 손자를 데리고 아들 김구가 있는 상해로 건너와서 이역 타관에서 분투의 생활을 했다. 2년 전에는 김구의 아내가 병마에 걸리어 이역 강산에서 생을 마감하자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오직 죽은 며느리의 소생인 6살 손자와 두 살이 된 손자를 데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냈다.

근일에는 다시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이다. 아들이 만류하자 '백골이나 고국 강산에 묻히겠다'며 상해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일반인들은 '그가 조선에 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어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며 근심 중이다."  
 
 백범 김구선생의 부부사진. 가운데가 큰아들 김인 지사. 한겨레 신문 갈무리.
 백범 김구선생의 부부사진. 가운데가 큰아들 김인 지사. 한겨레 신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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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국(안악)에 돌아와서도 그는 생활비를 절약해 김구에게 송금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1934년 일본의 눈을 피해 다시 장손 김인을 데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직접 손자를 군관학교에 입교시켰고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 20여 명을 돌봤다.

이처럼 곽낙원은 임시정부의 국모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 백범의 든든한 정신적 뿌리였다. 생활이 어려워 손자(김신)를 고아원에 맡기면서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김구와 임정의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보태던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9년 4월 26일 중국 쓰촨성 중경(충칭)에서 병사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나란히

1920년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던 김구의 장남 김인(1917~1945)과 그의 동생 김신(1922~2016)의 삶도 기구했다. 이들도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김인은 1935년 11월에 아버지 김구와 이동녕·이시영 등 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했다. 1936년에는 한국 독립군 특무대예비훈련소의 감독관으로 나가 군사훈련에 전념했다. 1937년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의 조직에 참여하고 다시 상해로 들어가 한국국민당청년단 상해지구 기관지 <전고>(戰鼓)를 발간하면서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백범 김구와 그의 아들들. 왼쪽이 장남 김인, 오른쪽이 차남 김신이다.
 백범 김구와 그의 아들들. 왼쪽이 장남 김인, 오른쪽이 차남 김신이다.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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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 창사(장사)에서 주석 김구의 명령에 따라 상해에 재차 잠입하여 당 재건과 일본의 중요관공서 폭파 계획을 지휘 감독했다. 또 일본 전투군함 이즈모를 폭파, 격침할 준비를 하다 정보가 누설돼 실패했다. 1939년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했고, 1940년 충칭에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기관지 <청년호성>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하지만 김인은 폐렴을 앓다가 1945년 3월 29일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국 청두에서 작고했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곽낙원 여사의 유해는 며느리 최준례 여사, 손자인 김인과 함께 1948년 8월 8일 오후 2시경 네벨트 호에 실려 비 내리는 인천항에 도착했다. 유골은 서울 회현동에 경교장에 안치하였다가 경기도 남양주 가족묘에 안장됐다. 그러다 손자 김인과 함께 199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2묘역으로 이장됐다. 며느리인 최준례는 효창공원 백범의 묘에 합장됐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는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지사의 묘가 나란히 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는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지사의 묘가 나란히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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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해방의 기쁨을 보지 못한 이들 3인과는 달리 김인의 동생 김신은 승승장구했다. 충칭 임시정부 시절에 잠시 연락과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가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과정을 마쳤다. 이후 미국 텍사스 주의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윈난 성과 인도의 펀자브에서 조종사 훈련을 마친 뒤 대일 항공전에 참가했다.

해방되자 아버지 김구와 함께 귀국하여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으며 1948년에는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5·16 군사 쿠데타 후 구성된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었다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 교통부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 백범김구기념관 관장과 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냈다. 2016년 5월 19일 향년 93세 노환으로 별세해 장례식은 공군장으로 엄수되었고,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사진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은 해방후 공군참모총장까지 지냈다. 2016년 5월 19일 노환으로 별세해 공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사진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은 해방후 공군참모총장까지 지냈다. 2016년 5월 19일 노환으로 별세해 공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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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묘역엔 김구 암살 배후 '김창룡' 안장

김신이 묻힌 장군 제2묘역으로부터 600여m 떨어진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는 그의 조모와 형의 묘가 있고, 그로부터 약 400여m 떨어진 장군 제1묘역에는 김구 선생 암살의 '실질적 배후'로 지목받는 김창룡이 안장돼 있다.

얼마 전 이장된 홍범도 장군 묘와 김창룡 묘와의 거리도 600m에 불과하다. 독립운동가와 친일 인사들이 한 공간에서 추모 받는 모순을 바로잡으라는 시위는 올해로 20여 년을 넘어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함게 실렸습니다.


group시민미디어마당 http://omn.kr/group/citizenmedia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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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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