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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27일 재경성 완도유학생 구락부(김장열 씨등) 제5회 졸업생 기념사진이다. 이 사진은 3.1 기미독립선언이 있기 이틀 전에 찍은 것으로 당시 완도유학생들은 민족독립투쟁을 다짐하는 모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항일의 결의를 바탕으로 완도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이 사건은 완도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4월 7일 김우진 등을 중심으로 20여명이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해 다음날인 4월 8일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었는데 그날 저녁 모두 경찰에 검거되며 무산됐다.

이러한 완도의 젊은 청년들의 항일 고취와 소안도의 항일 투쟁으로 말미암아 일제는 "대한민국은 용서해도 완도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이 시기는 극렬한 완도의 항일운동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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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일제시대 신사 참배 장면으로, 하나같이 우울한 표정인데, 우측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사진 왼편에는 학생들이 동원돼 도열해 있는 모습. 사진은 1940년대 초의 일제시대 신사 참배 장면으로 당신 완도의 일본 신사는 서망산 아래 현 충혼탑이 있는 자리해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인들을 매우 강하게 압박하는 시기였으며 특히 기독교 집회를 훼방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반대 인사들을 계속해 회유하며 협박했다. 

일제는 1937넌 9월 6일을 애국일이라 하여 일본국기 계양,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시 암송을 지시했고 이어 '일면일신사' 정책을 수립해 각 읍면마다 신사를 하나씩 세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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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20년 5월 19일에 창립된 완도군 청년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지역 청년활동을 이끌었던 김장렬(1899~1959) 선생으로 첫번째 사진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김장렬은 완도지역에서 배출한 초대 국회의원이자 제헌의원으로, 보성중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돼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본의 전문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완도에 노화 금일 서성학교를 세웠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완도군 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투신했다.

제헌의원에 당선 된 후에는 헌법기초의원을 선출하는 전형의원(각도별 1명 선출)에 선출된 바 있으며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직을 내놓았다.

또 옛기사에는 완도청년연합회의 주최로 소안도노농회 간부로 공무방해죄명하에 광주형무소에서 1년의 수감생활을 하고 금번에 출옥된 신준희, 김형천, 정남국씨의 환영회에서 김장렬 군의 환영사가 이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지난호 <완도신문> 창간기념 31주년 옛사진편 '박정희와 이병철, 그들은 왜 완도를 찾아왔을까?'의 내용 중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는 청해여관의 둘째 동생인 최복렬씨이며, 박 대통령 앞에 머리가 벗겨진 이는 김현제씨, 황권태씨'의 내용 중 후손인 황욱씨는 이 자리에 황권태 씨는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와 이를 정정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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