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해리 포터를 연기한 배우로 매우 유명하다. 영국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레드클리프는 2001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오디션에서 무려 4만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해리 포터 역에 낙점됐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시작으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까지 10년 동안 8편의 시리즈에 출연한 래드클리프는 <해리포터>를 통해 세계적으로 77억 달러라는 경이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래드클리프라는 배우에게 해리 포터를 지운다면 그의 커리어는 상당히 초라해진다. 실제로 래드클리프가 <해리 포터> 이후 출연한 영화 중 북미 1억 달러 이상의 성적을 거둔 영화는 카메오로 출연했던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뿐이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해리 포터>의 이미지를 떨치기 위해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지만 해리 포터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헤르미온느'의 이미지를 빠르게 지운 엠마 왓슨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대작에 출연해 유명세를 떨친 배우가 이미지에 갇혀 긴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를 영화계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캐릭터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1997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로즈를 연기해 '만인의 연인'으로 떠올랐던 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로즈의 망령(?)을 비교적 빨리 떨쳐내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았다.
   
아카데미 후보 7회에 빛나는 연기파 배우

영국 배우 출신 집안에서 자란 케이트 윈슬렛은 어린 시절부터 연기 수업을 받으며 아역배우로 활동했다. 그리고 1994년 훗날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해지는 피터 잭슨 감독의 <천상의 피조물>에 캐스팅돼 할리우드와 인연을 쌓았다. 1995년 이안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유명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윈슬렛은 1997년 자신의 운명을 바꾼 영화 <타이타닉>을 만났다.

이미 최고의 청춘스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잭 역으로 낙점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로즈 역에 신선한 느낌의 신인 배우를 원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윈슬렛의 연기를 본 카메론 감독은 그녀의 고전적이면서도 풋풋한 매력에 반해 윈슬렛을 로즈 역에 캐스팅했다. 그리고 <타이타닉>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세계적으로 21억8600만 달러의 흥행성적과 함께 1998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11개 부문을 휩쓸며 '전설'이 됐다.

<타이타닉>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윈슬렛은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세익스피어 인 러브> <애나 앤드 킹> 같은 시대극 로맨스물을 모두 거절했다. 대신 알츠하이머 병을 다룬 드라마 <아이리스>, 범죄스릴러 <데이비드 게일>, 가족 드라마 <네버랜드를 찾아서> 등에 출연하며 연기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2004년 윈슬렛이 선택한 작품은 미쉘 공드리 감독의 독특한 판타지 멜로 <이터널 선샤인>이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윈슬렛 외에도 짐 캐리, 커스틴 던스트, 마크 러팔로, 일라이저 우드로 이어지는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시공을 넘나드는 판타지 멜로는 관객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오지 못했고 <이터널 선샤인>은 세계적으로 7400만 달러라는 다소 아쉬운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다양한 머리 스타일 만큼이나 다양한 매력을 뽐낸 윈슬렛의 연기는 <타이타닉> 로즈의 그림자를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알찬 필모그라피를 쌓던 윈슬렛은 2008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여전히 <다이버전트> 같이 스케일이 큰 영화부터 <스티브 잡스>같은 작은 영화까지 다양하게 출연하고 있는 윈슬렛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아카데미에서만 7번이나 노미네이트됐다. 내년에는 <타이타닉>을 함께 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신작 <아바타2>에 출연할 예정이다. 

역대 재개봉 영화 최다 관객 작품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여자 친구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와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자 조엘(짐 캐리 분)의 기억 여행을 다룬 판타지 멜로 영화다. 꿈과 현실,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교차하고 미쉘 공드리 감독 특유의 독특한 영상미가 더해진 독특한 느낌의 영화다. 이 때문인지 <이터널 선샤인>은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2005년 국내 개봉 당시 전국 17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개봉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터널 선샤인>은 입소문을 통해 퍼져 나갔고 결국 국내 개봉 10주년이 되는 2015년과 2018년 두 번에 걸쳐 재개봉에 들어갔다. 그리고 재개봉된 <이터널 선샤인>은 전국 50만 관객을 돌파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정식 개봉 당시의 흥행 기록을 2배 이상 넘었음은 물론이고 역대 재개봉 영화 흥행 기록이었던 <타이타닉>의 36만 명을 가뿐히 뛰어 넘는 재개봉 영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주제는 인위적으로는 지울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클레멘타인과 헤어진 후 조엘은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을 모두 지우려 하지만 가수면 상태에서 기억 속을 헤매다가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지우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다. 결국 조엘은 꿈 속에서 기억을 지키기 위한 혼자만의 추격전(?)을 벌인다.

기억을 지운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함께 달리는 차 안에서 매리(커스틴 던스트 분)가 보낸 테이프를 듣는다. 테이프 안에는 서로에 대한 비난의 말들만 담겨 있지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인위적으로 지울 수 없었던 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짧은 명대사 "O.K"를 전한다. 기자 출신의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터널 선샤인>에 '사랑영화가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한 줄 평과 함께 10점 만점을 줬다.

남자 주인공 조엘을 연기한 짐 캐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코미디 배우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브루스 올마이티>로 세계를 웃겼던 짐 캐리에게 <이터널 선샤인>은 대단한 도전이자 변신이었다. 비록 영화는 크게 흥행하지 못했지만 짐 캐리는 실연에 아파하는 멜로 주인공 역할도 얼마든지 소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짐 캐리가 <이터널 선샤인>으로 골든 글러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헐크가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었나
   
1990년대 초반부터 활동하며 어느덧 50대의 중견배우가 됐지만 마크 러팔로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2012년 <어벤저스>의 헐크가 출발점이었다. 이후 <나우 유 씨 미 : 마술 사기단> <비긴 어게인> <스포트라이트>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분노하면 전투력의 끝을 알 수 없는 헐크의 강렬한 인상을 이기긴 힘들었다. 그런 마크 러팔로도 <어벤저스>를 만나기 전까진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던 배우였다.

마크 러팔로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에서 하워드 원장(톰 윌킨슨 분)의 조수 스탠을 연기했다. 스탠은 성실하게 작업을 하면서 매리와 몰래 연애행각을 벌인다. 하지만 사실 스탠은 매리가 하워드 원장을 사랑했다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직장상사를 사랑했던 여자를 사랑하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이다.

반면에 일라이저 우드가 연기한 패트릭은 <이터널 선샤인>의 최대 악역이다. 기억을 지우러 온 클레멘타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 패트릭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추억들을 몰래 빼돌려 기억을 지운 클레멘타인을 유혹하는 데 이용한다. 다행히(?) 보스턴의 찰스강에서 조엘과의 추억이 무심결에 떠오른 클레멘타인은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집 앞에서 클레멘타인이 패트릭에게 외치는 "꺼져버려"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가장 통쾌한 대사였다.

2000년대 초반 스파이더맨의 여자친구 메리 제인 왓슨으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커스틴 던스트는 <스파이더맨> 2편과 3편 사이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만났다. 남자친구 스탠을 놔두고 결혼한 하워드 원장을 좋아하는 매리 역이었다. 사실 하워드와 매리는 과거 사랑했던 사이였고 매리는 새 출발을 위해 기억을 지우고 스탠과 사귄다. 하지만 기억을 지운 매리도 끝내 하워드 원장과 사랑했던 감정만은 지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