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집에도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인가? 이 집을 찾은 날, 늦장마는 짓궂고도 사나웠다. 전염병으로 출입마저 제한된 이젠 늙어버린 집이, 120년 풍상을 겪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사위는 빗소리를 빼곤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중명전 전면 긴 시간의 상흔을 씻어내고 다시 제 모습을 찾은 중명전이 비에 흠씬 젖고 있다. 전염병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더 쓸쓸해 보인다.
▲ 중명전 전면 긴 시간의 상흔을 씻어내고 다시 제 모습을 찾은 중명전이 비에 흠씬 젖고 있다. 전염병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더 쓸쓸해 보인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붉은 색 집이 삶을 능욕당한 독립투사의 뒷모습을 닮아서였을까? 가을을 재촉하는 늦장마에 흠씬 젖은 중명전(重眀殿)이 조금은 울적해 보인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악덕 친일경찰에게 취조당하며 뺨을 맞아야만 했던 어느 독립투사의 얼굴이 이 집에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우리는 강제로 주권을 유린당했으며, 그 일로 지존이 강제 퇴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황제의 공간이 외국인 사교 클럽으로 전락해 버렸고, 화마에 그을려 사지가 잘려나갔다. 여러 주인을 전전하며 끝내 얼굴마저 잃어버린 가련한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제 모습을 찾기까지 무려 107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민족은 분단되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잘린 남쪽은 위상을 높이고 힘을 길러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었다. 삶을 능욕당한 이 집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어줄까?

수옥헌의 재탄생

조미수교 직후 미국은 경운궁 주변 토지와 집을 사들여 공사관을 짓는다. 여분의 토지와 집은 공사관 직원 및 선교사들 거주지로 사용한다. 고종은 1896년 경운궁 확장을 꾀한다. 궁궐 영건은 아관파천 및 환궁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런 경향은 경운궁 주변 외국인 및 민간 소유 토지에 대한 지속적인 매매로 이어진다. 중명전(수옥헌) 터는 1896∼1998년 사이 궁궐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수옥헌 1899년 3월 아펜젤러가 촬영한 사진. 베란다가 있는 넓은 4각 평면에 1.5층으로 추정되는 지붕 속 공간이 굴뚝 아래 보인다. 독립신문 기사에 "존 헨리 다이가 2층으로 설계하였다"고 소개된 이유로 추정된다.
▲ 최초의 수옥헌 1899년 3월 아펜젤러가 촬영한 사진. 베란다가 있는 넓은 4각 평면에 1.5층으로 추정되는 지붕 속 공간이 굴뚝 아래 보인다. 독립신문 기사에 "존 헨리 다이가 2층으로 설계하였다"고 소개된 이유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소장)

관련사진보기

 
이 집은 황실도서관(Kings Library)으로 1897년 10월 미국인 토목기사 존 헨리 다이가 설계(독립신문 영문판 10월 23일자)하였다. 분명한 것은 베란다를 갖춘 우진각 지붕의 단층 '수옥헌(漱玉軒)'이 1899년 3월 이전에 지어져 황실 소유였다는 점이다. '옥(玉)을 씻는다'는 뜻의 수옥헌은 1901년 11월 16일 화재로 전소되어 버린다.
 
1905년 수옥헌(중명전) 1902년 이후 새롭게 건축된 수옥헌의 모습이다. 미국 공사관 쪽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05년 수옥헌(중명전) 1902년 이후 새롭게 건축된 수옥헌의 모습이다. 미국 공사관 쪽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미 코넬대 소장)

관련사진보기

 
1902년 5월 수옥헌 재건에 착수한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의문을 제시하는 연구도 있음)로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의 건물은 3면에 베란다를 두고 1, 2층 외측을 회색 난간을 두른 말굽모양 아치로 장식하였다.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적절히 혼합하였고, 우진각 지붕이다. 내부 평면은 기능에 충실한 공간분리로 황실 도서관으로서 품격을 한껏 높이고 있다.

1901년 11월 대한제국 정부는 훈령으로 경운궁 주변 500m 이내 토지와 건축물에 강력한 규제정책을 실시한다. 토지와 건물의 매매는 물론, 신축을 불허한 것이다. 규제 후속조치는 1902년 5월 효력을 발휘한다. 미 공사관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히려던 선교사들이 서대문 등지로 이전하게 된 이유다. 이는 자연스럽게 궁궐 주변 토지를 수용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미국 공사관 주변 좌측 수옥헌과 우측 현재 미 대사관저 모습이다. 하얀 담장 자리에 정동극장이 들어섰다.
▲ 미국 공사관 주변 좌측 수옥헌과 우측 현재 미 대사관저 모습이다. 하얀 담장 자리에 정동극장이 들어섰다.
ⓒ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보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경운궁 영건에 온 힘을 쏟는다. 영·미 공사관이 경운궁 허리부분을 차지해 잘록한 모양새이기는 했으나,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지금의 시청 광장까지를 아우르는 넓은 영역에 궁궐이 들어선다. 1902∼1903년 사이 궁궐위상에 걸맞은 영건작업이 마무리된다. 중층의 중화전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전(正殿)으로써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아! 을사오적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서울을 침범한 일본은 군대를 앞세우고 황제를 겁박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할 목적의 <한일의정서>체결을 밀어붙인다. 경부·경의선 철도부설권이 이때 일본 손아귀로 넘어가 버린다. 같은 해 6월 <한일양국인민어로구역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어 서해연안 어업권마저 잃고 만다.

1904년 4월 황제의 침전(寢殿)인 함녕전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다. 침전에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본이 고종을 해하려 의도적으로 불을 낸 것으로 읽힌다. 이 화재로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궁궐 주요전각이 소실되어 버린다. 궁궐 뼈대를 이루며 황제의 일상이 이뤄지는 정전(중화전), 편전(便殿, 즉조당), 침전(함녕전)을 모두 잃고만 셈이다.

이에 고종은 부득이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수옥헌이 편전과 침전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정부 주요 행사와 접견, 회의, 연회 등이 수옥헌과 화재에서 살아남은 경운궁 양관(洋館, 돈덕전 및 구성헌)에서 이뤄지게 된다.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을 포섭하고, 제2차 영·일 동맹을 통해 영국을 달래는데 성공한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진다. 한반도에서 방해세력이 사리진 것이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손탁호텔을 거점으로 외교권을 넘기라며 수차례 조약체결을 강압한다. 군대를 동원, 경운궁 및 정동 일대를 포위한다. 수옥헌은 헌병들이 겹겹이 둘러싼다. 11월 17일 오후 4시 여덟 대신이 참석해 수옥헌에서 시작한 어전회의가 8시에 무산된다. 황제는 함녕전으로 돌아간다. 이토가 어전회의장에 난입, 대신들에게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한다.
 
을사늑약 현장 재현 현 중명전 1층 좌측 방 '을사늑약 체결현장'에 재현되어 전시 중인 당시 모습이다.
▲ 을사늑약 현장 재현 현 중명전 1층 좌측 방 "을사늑약 체결현장"에 재현되어 전시 중인 당시 모습이다.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이토는 여덟 대신 각각에게 찬반을 묻는다. 민영기와 이하영은 반대의사를, 강력히 반대한 한규설은 감금된다. 하지만 을사오적이 적극 찬동하고 주도하여, 다음날 새벽 1시 수옥헌에서 불법적인 <을사늑약>이 날인되고 만다. 황제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후 고종이 '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헤이그에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중명전(수옥헌이 중명전으로 바뀐 시기는 1906년 말로 추정)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황제로 즉위한 순종이 1907년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까지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시련과 복원

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한다. 강점 이후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중명전은 외국인 사교모임인 서울구락부(Seoul Club)가 임대하여 사용케 한다. 고종이 덕수궁(고종 퇴위 후 경운궁이 덕수궁이 됨)에 계속 기거하고 있었지만, 일제는 1915년 덕수궁 경역을 축소하면서 중명전을 궁궐에서 제외시킨다.
 
1938년 중명전 1925년 화재 이후 본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중명전 모습이다.
▲ 1938년 중명전 1925년 화재 이후 본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중명전 모습이다.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서울구락부가 사용 중이던 1925년 중명전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외벽만 남기고 전부 소실되어 버린다. 화재 원인을 누전으로 추정 할 뿐이다. 당시 건물과 집기는 화재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화재 뒤 다시 재건하지만 집은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계속 사용하기는 했어도, 이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되어 황제가 거주하던 품격은 찾아 볼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1954년 중명전 외관 일부를 빼곤 최초 건축된 모습을 전혀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
▲ 1954년 중명전 외관 일부를 빼곤 최초 건축된 모습을 전혀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1945년 해방되어 왕실재산이 국유재산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중명전도 국유가 된다. 이를 박정희가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 부부에게 소유권을 이전해 준다. 영친왕 아들 이구(李玖)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중명전은 1977년 민간에 매각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 후에 관리 소홀과 개조, 잦은 화재로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버린다. 1983년 서울시가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자, 소유주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한다.

2003년 국립 정동극장이 매입하여 문화재청 관리로 전환된다.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2007년 비로소 다시 덕수궁 경역에 편입된다. 92년 만에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후 2009년 12월 옛 모습으로 복원을 거쳐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복원에 대해선 '처음 모습과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09년 12월 복원된 중명전 최초 지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1층 정면의 포치가 2층까지 이어져있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 2009년 12월 복원된 중명전 최초 지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1층 정면의 포치가 2층까지 이어져있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 문화재청

관련사진보기

 
중명전은 '일월(日月)이 함께하여 광명이 그치지 않고 거듭된다'는 뜻이다. 편액의 眀(명)자 중 日(일)을 目(목)으로 쓴 것이 특이하다. 해(日)를 거듭하여 강조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중명전이 살아온 날들은 결코 이름에 부합하는 삶이 아니었다.

도시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면, 개개 삶의 형체를 규정짓는 것은 건축이다. 따라서 삶의 양식이 바뀌게 되면 건축과 의식, 행위양태도 같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각성을 통해 더욱 풍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경운궁(덕수궁)에 중명전을 비롯한 양관(洋館)을 짓기 시작한 고종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비록 한참 늦었지만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려던 그 노력이 한편으론 눈물겹기까지 하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