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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5일.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곡물창고 문이 열렸다. 창고 안 사내들은 대부분 쪼그려 앉아 있었다. 160여 명의 사내들이 누워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금된 이들은 파김치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일 년 중 제일 더운 한여름에 창고에 며칠간 구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영덕군 보도연맹원들이었다. 

오십천으로 목욕하러 간 사내들

열린 문 사이로 영덕경찰서(서장 박주현) 경찰 간부가 희소식을 전했다. "전부 오십천으로 목욕하러 간다." 사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쉰내가 진동하는 갑갑한 창고에서 맑은 바람을 쐬고 강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니,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경북 영덕군 영덕면 소재지 곡물창고에서 오십천변으로 향하는 보도연맹원들의 행렬은 무척 길었다. 그런데 이들을 인솔하는 경찰은 5~6명에 불과했다.

오십천에 당도한 사람들은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런데 옷을 벗지 않은 이들 몇몇이 주변을 살피더니 슬쩍 천변을 지나 빨리 걷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인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이들이 분명히 보였을 텐데 말이다.

목욕 시간은 30분 남짓. 그들은 다시 창고에 구금되었고, 곧이어 오십천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뫼골로 다시 옮겨졌다. 조금 전 대열에서 이탈한 이민채(가명, 영덕군 달산면 덕산리)는 매봉산 산허리에서 뫼골로 가는 행렬을 보았다. 이민채는 발걸음을 멈추고 숲에 숨어서 뫼골을 응시했다.

잠시후 군인들이 '앞에 총' 자세를 취하더니 "탕탕탕"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방금 전 오십천변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생각한 이민채는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1950년 7월 15일 영덕군 보도연맹원 약 160명을 죽음으로 몬 이들은 국군 제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경북 영덕군 영덕면 화개리 뫼골 학살 현장
 경북 영덕군 영덕면 화개리 뫼골 학살 현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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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되자 보도연맹에 가입

일제강점기에 징용을 갔다 온 이상배(1922년생)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빨치산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심부름의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2년의 수형 생활을 한 그가 고향인 영덕군 지품면 오천리로 돌아오자 지품지서에서 호출이 왔다. 

지품지서장 노도술은 "자네 여기에 도장 찍게"하며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꺼?"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다는 것일세." 지서장의 책상에 놓여 있는 종이는 다름아닌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였다. 얼마 전 석방된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행님, 지도 도장 찍었다 아입니꺼." "뭔 소리고?" "행님이 찍었다는 보도연맹 가입서 말입니더." 이상배의 동생 이상국(1927년생)은 좌익 활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이상배도 보도연맹 가입자를 늘리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왔다는 얘기를 지서에서 들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진 지 보름이 지나자 보도연맹원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이상배·이상국 형제는 지품지서에 연행된 후 영덕경찰서로 이송됐고 경찰서에서 200미터 떨어진 곡물창고에 구금되었다. 창고에는 이미 1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있었다. 영덕군 내 남부 5개면(영덕면,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 보도연맹원이 이곳에 총집결됐다.

이상배가 연행된 후 발만 동동 구르던 가족들에게 "장날 오십천변으로 면회를 오라"는 기별이 왔다. 이상배의 아내 박군남은 아들 이수형(당시 집 나이 9세)과 함께 면회를 하기 위해 7월 14일 오십천변에 갔다.

오십천변에는 대형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영덕군 내 여러 곳에서 남편과 자식 면회를 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형이 아버지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해꼬지 할려고 한다'는데 상황 봐서 몸을 피하소." "무슨 소리고! 내가 과거에 죄지은 일로 형무소에 2년이나 갔다왔고서로. 아무 걱정 말고 수형이 델꼬 가소." 걱정 말라는 남편 말만 믿고 집으로 돌아간 박군남이 다음 날인 7월 15일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보도연맹원들이 뫼골에서 전부 학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영덕군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곡물창고 터 앞에 선 이수형
 영덕군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곡물창고 터 앞에 선 이수형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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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 후 수장

영덕군 강구면 3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지서 부근 천막에 구금되었다. 남편 이소치가 연행되자, 지서 옆에 거처하면서 밥을 대주던 최문녀(당시 21세)는 새벽에 한 행렬을 목격했다. 남편을 포함한 3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뒷결박을 하고 몸이 포승줄로 묶인 채 강구지서 소속 경비정에 실리는 것이 아닌가. 차마 그녀도 남편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그 날은 1950년 7월 14일 새벽 6~7시경이었다. 

배가 포항 방면으로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들렸다. 총소리였다. 총살 당한 시신들은 바다로 던저졌다. 남편이 총살당했음을 직감한 최문녀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시 경비정 기관장의 전언에 의하면 강구지서 경찰 몇 명이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태웠고, 기관장은 기관실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보도연맹원들을 총살 후 수장했다고 한다. 수장 당한 이들 중 시신이 수습된 이는 강구4동 연변 백사장으로 떠내려온 김태산이 유일하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이렇게 해서 영덕군 남부 5개면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영덕면 화개리 뫼골에서 학살됐고, 강구면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강구 앞바다에서 총살되어 수장됐다. 영덕군 내 북부 4개면(축산면,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 보도연맹원들은 여러 곳에서 학살되었다. 영해면과 창수면 보도연맹원들은 각각 영해지서와 대진지서(영해면 내 6개 마을 관할), 창수지서에 소집된 후 울진군 기성면 어티재에서 학살되었다.

다른 장소에서도 학살은 일어났다. 창수면 인양리의 남호술과 신기리의 전덕구·전상호 형제 등은 창수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들은 인민군들이 창수면으로 내려오기 직전 영덕면과 축산면의 경계인 상곡재에서 학살됐다.

또 지품면 대리 장육덕은 화개리 뫼골 학살 현장에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오다가 경찰에 의해 붙잡혀 지품지서에서 살해됐다. 이외에도 1960년 제4대 국회의 <국회양민학살보고서> 영덕군 피해 신고서를 보면 달산면 도천곡, 영덕 업머리 등 여러 곳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고 돼있다.

"보도연맹원들을 죽이면 안 된다"

시동을 건 GMC트럭이 막 움직이려는 찰나 웬 사내가 트럭 앞에 서서 팔을 벌렸다. 조수석에 탄 김경무(가명) 차석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트럭문을 열었다.

"회장님예 우짠 일이십니껴?" "이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영덕경찰)서에서 데려오라는 지시입니다." "이 사람들을 글로(거기로) 데리고 가면 전부 죽어요. 보도연맹원들을 죽이면 안 되오."

트럭을 막아선 이는 영덕군 남정면 독립촉성국민회 회장 김현룡이었다. 남정면의 내로라하는 유지인 김현룡이 이렇게 말하니 김경무 차석은 난감하기만 했다. 김 차석은 지서장과 상의 후 남정면 보도연맹원을 석방시켰다. 물론 영덕유족회 김달호(1942년생, 경북 영덕군 강구면 금호리) 회장은 "남정면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살아났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뫼골에서 총살되었다"고 증언했다.

어쨌든 영덕군 남정면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김현룡에 의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 오십천변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탈출해 목숨을 건진 것은 영덕경찰서장 박주현의 기지 덕분이었다. 박주현 경찰서장은 일부 보도연맹원을 풀어 주기도 했는데 신병용(영덕면 구미리)은 대량 학살 전날 밤 석방돼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십천변에 목욕을 하러 갔던 160여 명의 사내 중 탈출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대부분 연맹원들은 "지은 죄가 없고, 다시 소집되어 오면 귀찮다"면서 그대로 있었다. 경찰의 언질을 들은 이들만 달아나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조촐한 위령제의 값비싼 대가
 
영덕군 합동위령제를 치렀던 영덕초등학교(현 야성초등학교)
 영덕군 합동위령제를 치렀던 영덕초등학교(현 야성초등학교)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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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 경인년(庚寅年) 6월 초하루(1950년 7월 15일) 영덕면 화개리 뫼골에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160여 영령들의 해원안식을 기원하나이다. 상향."

축문을 읽은 김우인은 두 번 절을 올렸다. 제상이 차려진 영덕초등학교(현 야성초등학교)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위령제 참석자가 제주 김우인(영덕면 화개리)과 술 따라주는 사람, 이렇게 세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영덕면 화개리 뫼골에서 죽어간 160여 명 보도연맹원 합동위령제 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그나마 사과, 배, 포라도 올려놓고 조촐하게나마 제사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1960년 4.19 혁명 덕분이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서 위령제를 치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난 그해, 160여 영령의 해원안식을 기도했던 김우인의 꿈은 1년 후 산산조각이 났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으면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탄압했다.

당시 영덕군에는 유족회도 없었고, 김우인은 대표성도 없었지만, 그는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그저 조촐한 위령제를 치렀을 뿐인데 말이다. 이같은 사실은 영덕유족회 김달호 회장과 이수형 회원의 증언에 의존한 바가 크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구체적 사실을 확인하려 했으나 워낙 오래된 사건인 탓에 사건 관련자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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