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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중국 관동주(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던 요동의 조차지) 유조호(柳条湖) 인근의 남만주 철도노선이 일본 관동군의 자작극으로 폭파됐다. 폭발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미 만주 병탄을 결심했던 관동군은 이 사건을 구실로 봉천군벌의 북대영(北大営)을 공격했다.

훗날의 중일전쟁이 그러했듯, 만주사변 역시 본국 내각의 승인 없이 그렇게 시작됐다. 이날 이후 제국 일본은 1945년 패망에 이르기까지 15년 간 전란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관동군은 1932년 1월 봉천군벌의 군사거점인 진저우를 함락시켰고, 이어서 2월에는 하얼빈까지 접수하였다. 이로서 만주는 완전히 관동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 진저우에 입성하는 관동군 관동군은 1932년 1월 봉천군벌의 군사거점인 진저우를 함락시켰고, 이어서 2월에는 하얼빈까지 접수하였다. 이로서 만주는 완전히 관동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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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성과 길림성의 철도를 따라 침공을 개시한 관동군은 지역 유지들에게 봉천군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시키며 승기를 잡아갔다. 봉천군벌은 국민당 중앙정부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항공기와 같은 일부 무기체계면에서는 오히려 중앙군 이상의 규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봉천군벌의 지도자였던 장쉐량(張學良)의 오판으로 반격의 적기를 놓치면서 무력하게 궤멸됐다.

1932년 1월, 봉천군벌의 군사거점이었던 진저우(錦州)까지 함락시킨 관동군의 눈에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 다음달, 관동군은 '신국가건설 막료회의'를 열고 노골적으로 괴뢰국 건국 작업에 착수했다.

만주사변을 주도한 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중좌는 일본군이 만주를 직접 군사점령하고 총독부를 설치해 조선·타이완과 같이 식민통치를 실시하는 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조선이나 타이완을 병탄하는 것과 만주를 병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일본군의 직접 점령이 사변의 수습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중국에 각종 이권들을 보유하고 있던 열강들이 일본의 만주병탄을 그대로 묵과할 리 없었다. 만주병탄이 곤란하다는 판단이 서자 이시와라 중좌는 원안에서 한 발 물러서 '만몽문제해결방책(満蒙問題解決方策)'을 제시했다. 이시와라 중좌가 제시한 방책이란 것은, 지난날 강제퇴위 당했던 청나라 선통제 푸이를 지도자로 삼고 봉천군벌 인사들을 등용해 새 정권을 수립한다는 발상이었다.  

맞아떨어진 이해관계... 새 정권이 수립되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는 신해혁명 이후로도 한때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보장받았으나 핍궁사건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청나라 황릉 도굴 사태까지 벌어지자 격노한 선통제는 일본에 합류하여 만주국 집정에 취임,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만주국 황제에 올랐다.
▲ 만주국 황제 푸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는 신해혁명 이후로도 한때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보장받았으나 핍궁사건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청나라 황릉 도굴 사태까지 벌어지자 격노한 선통제는 일본에 합류하여 만주국 집정에 취임,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만주국 황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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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통제 푸이는 청 황실 우대조치가 폐지되고 난 뒤 온갖 굴욕과 박대를 감내하고 있었고, 관동군은 국제사회의 눈을 속일 괴뢰정권의 간판이 필요했으므로 일단 이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건국이 선포됐고 선통제 푸이는 새로운 국가의 집정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9월 1일, 제국 일본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이시와라 중좌가 보기에 만주는 장차 벌어질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권역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만주국 건국은 일본이 '세계최종전쟁' 승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저항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으로 격렬했다. 관동군 헌병대는 5만 명에 불과했던 항일세력이 만주사변 직후 4배 이상 뛴 22만 명에 달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일본군은 기존 군벌 및 토착 세력을 포섭하고 만주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저항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특히 부농 등 지역 유지들의 세력이 강한 독립적 시장권역 둔(屯)에서의 저항이 완강했다. 둔의 지도자들 중 일본에 포섭되지 않은 이들은 관동군과 만주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고 지역민들을 무장시켜 투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주국의 국방과 치안유지를 담당했던 '만주국군'의 중요성은 빠르게 부상했다. 봉천군벌 잔존 전력을 중심으로 건군됐던 만주국군은 만주지역 내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전개될 중국 화북지역으로의 침략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일본 군부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일본군은 만주국군 양성을 위해 관동군 장교들을 파견하고 교관과 물자를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합격자들 중 일부 선발해 만주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까지 했다.

'일만일체(日満一体)'라는 일본군의 구호 그대로 만주국군은 독립국가의 국방군이 아닌 일본군 대륙침략의 최선봉 부대와도 같았다. 오족협화(五族協和; 일본인, 만주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 등 5개 민족이 어우러져 이상국가를 건설한다는 만주국의 선전문구)의 기치 아래, 만주국군에는 여러 민족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몰려들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만주국군의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고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전선으로 차출되면서, 만주국군은 관동군의 공백을 채울 대안으로써 일본군의 기대를 모았다.
▲ 만주국군 비행대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만주국군의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고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전선으로 차출되면서, 만주국군은 관동군의 공백을 채울 대안으로써 일본군의 기대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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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내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은 차차 소멸돼 갔지만 중국과의 대치가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소련과의 국경분쟁이 첨예해지면서 만주국군의 역할은 더욱 커져갔다. 1939년 만주국군관학교가 개교해 만주국군 장교의 대량양성 체계가 마련됐다는 것은 만주국군에 대한 일본군의 기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만주국군이 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의 골은 나날이 깊어져갔다. 그것은 오족협화라는 구호 뒤에 숨겨진 민족모순의 문제였다.

겉으론 '하나'였지만... 내부에선 갈라졌던 군 

만주국군 내 일본인들은 당연히 제국 일본과 만주국을 운명공동체로 바라봤지만 만주국군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만주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일본의 중국 침략을 목도하며 자라난 세대였고, 기본적으로 강한 항일의식을 품고 있었다. 만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들에게는 급조된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출세를 위해 만주국군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중국인들은 만주국군관학교를 비롯해 군 조직 곳곳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서 암암리에 항일 활동을 이어갔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중일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중국계 만주국군 장병들은 사실상 일본이나 만주국 측에 있어 신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한편, 만주국군 내에서 '흥안군(興安軍)'이라는 이름으로 편성된 몽골인들 역시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과는 품고 있는 속셈이 달랐다. 이들은 소련의 위성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중국에 의한 내몽골 지배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몽골족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보장한 만주국은 몽골인 만주국군 장병들에게 있어 '몽골 해방'의 대의를 실현시켜나갈 교두보와 같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일본이나 만주국에 충성한다기보다 일본과 만주국을 몽골 해방 사업에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근대지식과 선진화된 군사교육을 받아서 몽골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몽골 청년들이 흥안군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1939년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를 기점으로 금이 가게 된다. 몽골인 만주국군은 몽골인에 대한 관동군의 몰이해와 불합리한 작전운용에 실망했고, 소련군 측으로 참전한 몽골인민군과의 동족상잔에 큰 회의를 느꼈다. 흥안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곤두박칠치고 말았다.
 
"지원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 되고, 거기에 들어간 사람은 긍지를 갖게 됩니다. 교육의 내용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 만주국군관학교 입교 당시를 술회하는 김윤근 퇴역중장(2012년) "지원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 되고, 거기에 들어간 사람은 긍지를 갖게 됩니다. 교육의 내용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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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을 수 없었던 벽, 민족모순의 혼란

조선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만주군에 투신했다. 만주국군관학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식민통치 구조 아래서 조선인이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제한된 경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민족모순의 혼란 아래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들은 만계(중국계)로 분류돼 일본인 생도들과는 구분됐다. 7기에 이르러서야 조선인은 일본계로 분류될 수 있었지만 해당 기수의 조선인 입교생은 고작 한 명에 불과했다.

조선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계 생도가 됐던 김광식(金光植)씨는 2016년 일본학술진흥회 이쿠라 에리이(飯倉江里衣)씨와의 인터뷰에서 군관학교 내 조선인 차별은 없었다고 증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정한 일본인이 되어라'는 교관의 주문에 당혹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성장과정에서 황민화 교육을 받았고 군관학교에도 일계 생도로 입학했기에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지만, 결국은 넘을 수 없는 민족모순의 벽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제1해병여단장으로서 5.16군사정변에 가담하게 되는 김윤근 퇴역중장 역시 2012년 NHK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주국군으로 겪었던 민족모순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중대원 전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지고 말았나' 하고요. 저는 곤란했습니다. 저는 이제 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니까...(웃음) 살아돌아갈 수 있으니까 저는 기뻤어요. 그렇지 않나요? 모두 울고 있는데 저 혼자 기뻐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 난처했어요. (중략) 전쟁은 일본의 전쟁입니다.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그렇죠? 끔찍한 일을 벌였네요."

오족협화로 포장된 만주국군의 동상이몽은 1945년의 파국 속에서 비로소 거대한 균열을 드러냈다. 1945년 6월 이후 가시화되던 중국인 장병들의 '불온한 움직임'은 만주국군의 붕괴를 예고하는 전주곡과도 같았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고 만주작전을 개시하자 만주국군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관동군은 만주국군을 움직여 소련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만주국군 부대들은 소련군과 일전을 벌이기도 전에 허무하게 와해돼 버렸다. 중국인과 몽골인 장병들이 탈영하거나 심지어는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장병을 살해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면서 만주국은 완전히 존립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사흘 뒤인 18일, 만주-조선 국경지역까지 도망쳤던 만주국 황제 푸이는 스스로의 퇴위와 만주국 해산을 선언했다. 건국 13년만의 허무한 최후였다.

만주국의 패잔 병력들은 산산조각난 오족협화의 구호를 뒤로 하고 각자 살길을 찾아 방황하는 신세가 됐다. 중국인, 몽골인, 심지어는 귀국에 실패한 일부 일본인 장병들까지, 적지 않은 만주국군 출신자들이 이후 전개된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의 풍파 속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조선인 만주국군 장병들 역시 제국의 폐허를 넘어 살 길을 모색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해방된 조선의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12년 펴낸 <한국군 초기의 역사를 듣다>에서 이들 만주국군 출신자들이 '군사적 식견에서는 일본 육사 출신보다는 뒤졌지만, 만주라는 험난한 공간적 배경에서 성장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광복 직후와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평하고 있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만주국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거듭 호명되는 존재가 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가장 윗 사진의 장도영 중장(일본군 학도병)을 제외한 박정희 소장과 김윤근 준장은 만주국군 출신이었다. 만주국군 출신들은 5.16군사정변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국면들 속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 5.16군사정변 당시 쿠데타 주역으로 소개된 3인 가장 윗 사진의 장도영 중장(일본군 학도병)을 제외한 박정희 소장과 김윤근 준장은 만주국군 출신이었다. 만주국군 출신들은 5.16군사정변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국면들 속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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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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