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2 11:48최종 업데이트 21.09.12 11:48
  • 본문듣기
일본 극우세력은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다고 주장한다. 한국에도 이런 주장에 대한 동조자들이 있다. 친일청산이 추진되던 2005년에는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 출판물도 아닌 일본 출판물을 통해 그런 주장에 가세했다.

그는 그해 4월호 <세이론(正論)>에 '공산주의 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일한합병을 재평가하자'라는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한일합병'이라 하지 않고 굳이 '일한합병'이라고 한 데서도 글의 방향을 느낄 수 있다. 세이론 기고문이 한국에서 파문을 일으키자 그가 '내 진의는 이렇다'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한 한글 원문에도 '한·일'이 아니라 '일·한'으로 표기돼 있었다.


그는 일본어 번역문이 과장됐다며 한글 원문을 따로 공개했지만, 이 역시 사실을 왜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일제강점 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국가보안법 개정안 등과 더불어 4대 악법으로 평가했다.

그런 뒤 "오히려 근대화가 촉진됨으로써 잃은 것에 못지않게 얻은 것이 더 많았음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한 뒤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 민족문화가 발달했으며, 한국인들이 대일 경쟁심을 갖게 돼 성장·발전의 원동력을 얻게 됐다'는 점 등을 식민지근대화론의 증거로 예시했다.

한·일 양국 극우세력은 식민지 기간에 한국이 잘살게 된 것이 '팩트'라고 말한다. 그것을 한국인들이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라고 그들은 강변한다. 그 논리대로라면 식민지 근대화는 '불편한 팩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불편한 허구'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지난 8일 대전광역시가 개최한 제2회 대전역사문화 학술대회에서 제공됐다. '대전의 의료와 위생'이라는 주제 하에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 대회의 첫 번째 발표인 황상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역병'에서 그런 근거들이 제시됐다.
 

자혜의원 1916년. 서울역사 ⓒ 위키커먼스

 
일제강점기의 보건의료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이 근대화된 게 아니라 경제적·정치적 차별을 받았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 비해 보건·의료 면에서 어떤 차별이 있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의대에서 의사학교실 교수를 지낸 황상익의 발표는 식민지배 경험이 '불행 중 다행'이 아니라 '불행 중 불행'이었음을 보건·의료 측면에서 분명히 했다.

황 교수는 "일제는 자신들이 좋은 통치를 해서 조선의 발전을 가져왔고 조선이 근대화됐고 문명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합니다"라며 "그중에서도 의료와 교육 부문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러한 주장이 타당한지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의료인 숫자를 첫 번째 사례로 예시했다.

그는 일제강점 말기에는 의사 숫자가 인구 1만 명당 1명이 됐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 구경하기도 어려웠다"고 설명한다. 인구 400여 명당 의사 1명인 오늘날과 비교할 때 의사 숫자가 턱없이 적었기 때문에 "그건 의사가 없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고 평한다. 일제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떠나, 서양 의술을 배운 인력이 워낙에 적었기 때문에 대중이 혜택을 입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중의 의료 수요를 충족해주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의생(醫生)으로 폄하해 불렀던 전통 의료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대중이 수시로 접하는 의료인들은 주로 이들이었다.

서양식 의술의 혜택을 입기가 쉽지 않았으니, 의생의 숫자라도 늘어났어야만 식민지 한국의 의료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의생 숫자는 증가하기는커녕 제자리도 유지하지 못했다.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였던 것이다. 의생과 의사를 합한 전체 의료인 숫자는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아래 도표에서 두 번째인 검정 곡선이 식민지 한국 전체의 의료인 숫자를 표시한다. 의생과 의사의 총계를 보여주는 검정 곡선이 1914년부터 1943년까지 지속적으로 하강했음을 볼 수 있다. "조선 민중들은 의료로부터 갈수록 소외됐다"고 황상익 교수는 말한다.
  

발표에 사용된 파워포인트 화면. ⓒ 황상익

  
인구가 늘고 경제규모가 커지면 의료 서비스 역시 높아져야 마땅한데도, 식민지 한국의 의료 서비스는 도리어 감소했다. 조선에서 생산된 경제적 가치가 어디로 이전됐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의료 인력의 감소를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하게 되면, 한·일 극우세력들이 반론으로 제시하게 될 주장이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한국에 병원을 많이 세워줬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황상익 교수는 "일제는 각 곳에 큰 병원들을 세우고, 총독부나 도(道)에서 병원을 세우고 운영을 해서 조선 민중들에게 많은 의료 혜택을 베풀었다고 주장"한다면서 "그 주장이 어떤 면은 맞는 점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1910년에는 10개 정도에 불과했던 서양식 병원이 자혜의원(훗날의 도립의원)들과 총독부의원을 포함해 1940년에는 47개 정도까지 됐다고 설명한다.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규모도 커지고 예산도 늘어나고 (자혜의원 소속의) 의사 수도 늘어"났다고 말한다. 식민당국이 대형 병원을 짓고 인력·예산 지원을 늘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그 병원을 이용했는가" 하는 점이라고 황상익 교수는 말한다. 아래 표에 나타나듯이, 한국인의 이용 빈도는 매우 낮았다.

빨간 직선은 일본인 입원 환자의 증감, 빨간 점선은 일본인 외래환자의 증감을 표시한다. 다소의 굴곡이 있긴 하지만, 이 두 선은 1914년부터 1939년 사이에 대체로 상승 추세를 탔다.

반면 한국인 입원 환자를 나타내는 파란 직선과 한국인 외래환자를 표시하는 파란 점선은 최하단인 0 주변에서 맴돌았다. 식민지 한국의 대형병원들에서 한국인 환자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발표에 사용된 PPT 화면. ⓒ 황상익

 
명백한 사실들
   
위와 같은 사실은 식민지 한국에 세워진 병원들이 한국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많은 곳에 도립의원을 세우고 규모를 확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조선 민중들은 극히(발표 원문은 '아주')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그 혜택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황상익 교수는 말한다.

의사 숫자 및 병원 이용 빈도에 더해, 한국인의 보건 실태를 알려주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연간 사망자 총수에서 50세 이상 사망자의 비율을 보여주는 PMI 지수가 그것이다. 50세 이하 사망자보다 50세 이상 사망자의 비율이 높은 것은 노화에 의한 자연사의 비중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PMI 지수 역시 식민지근대화론의 오류를 보여준다. 황 교수에 따르면, 1910년에서 1937년까지 일본인의 PMI 지수는 30에서 40정도였다. 일본에서는 50세 이상 사망자가 전체 사망자의 30~40% 정도를 차지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인의 경우에는 25에서 30이었다. 50세가 안 돼서 죽는 사람의 비율이 일본보다 더 높았던 것이다. '25~30'과 '30~40'은 아주 큰 차이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데다가 일본이 자국과 한국은 하나라면서 내선일체를 부르짖은 사실을 감안하면, 이 차이는 식민지 한국과 제국주의 일본의 보건수준 차별을 반영하는 한 가지 지표가 될 수 있다.
    

발표에 사용된 PPT 화면. ⓒ 황상익

 
일본 극우세력에 동조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펴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 제23장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 편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식민지 한국인 전체의 보건 실태를 모르는 독자가 읽게 된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에 넘어갈 수도 있게 만드는 발언이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었습니다. 미군의 심문 기록은 그녀들의 건강 상태가 발달된 피임기구로 인해 양호하다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이 겪은 의료상의 차별은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인들이 다종다양한 수난에 시달렸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토지를 빼앗기고 행정권을 빼앗기고 군대를 빼앗기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을 착취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데서 그치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자료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