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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십이 싫은 이유
 
어머니는 그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물으셨다.
 어머니는 그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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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이렇게 손이 못생겼냐?"

백신 접종을 마치고 이상 반응을 체크하던 중이었다. 무료하셨는지 어머니는 그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내 손을 덥석 잡으며 그리 물으셨다. 나는 순간 당황해 잡힌 손을 획 잡아 뺐다. 어머니께서 오히려 더 놀라신 듯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신 채 날 올려다보신다. 난 괜히 죄송스러워 갑자기 그러니 놀라서 그랬다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반응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스킨십이 싫다.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은 영 어색하고 낯설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냥 하는 악수조차 달갑지 않다. 결벽증이나 그와 관련한 트라우마라도 있는 것처럼 유별나게 굴었다. 누군가 그런 식으로 장난이라도 하면 그가 민망해질 만큼 과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조금 전 어머니께 그랬던 것처럼.

그건 내가 자란 연관이 있을 거라 짐작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는 거다. 우리 가족은 스킨십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론 포옹을 하거나 어깨를 토닥이거나 손을 잡아본 기억조차 없다. 그걸 가훈이나 규칙으로 삼자고 합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린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고, 그렇게 컸다. 그래서 그런 거였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특히 군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도통 뵐 기회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당신의 주 근무지였던 파주나 의정부는 인천과 너무 멀었다. 오가는 데만 네댓 시간이 넘어 걸렸다. 따로 자취도 오래 하셨다. 그러니 아버지는 우리에게 거의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다 오랜만에 뵈면 낯설기까지 했다.

어머니도 궁색한 살림에 보탬이 될까 늘 분주하게 다니셨다. 뭘 하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집에 계신 날이 거의 없었다. 내가 예닐곱 살쯤, 동생 챙길 수 있을 때부터 그러셨다. 나는 동생을 들쳐 업고 미리 차려놓은 밥을 챙겨 먹고 동생을 먹이며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집에 돌아오셔도 당신은 바쁘셨다. 장부를 정리하고 밀린 집안일을 하셨다. 대화할 틈이 없었다.

두 분 다 잔정은 없으셨다. 속정이야 깊으셨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다. 살갑게 다독이고 어루만져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서로 해 본 기억이 없다. 물론 그게 방임이나 방치의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두 분은 부모로서의 역할과 의무에는 늘 최선을 다하셨다. 다만 타고난 성격이 그랬고 하시는 일들이 그랬을 뿐이었다.

가족의 의미

가족은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릴 지켜주는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다. 언제든 깃들어 쉴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식구들은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기반으로 강력한 유대와 관계를 공유한다. 친밀한 스킨십과 따스한 대화는 그걸 확인하고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이다. 누군가는 부모의 그런 손길과 말길은 자식의 상처에 흐르는 피조차 멈추게 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그런 게 없었다. 나와 동생은 부모님의 체제(?)에 순응했고 그렇게 길들여졌다. 그래서 우린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경우도 없었다. 당사자인 우리는 그렇게 건조하게 사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했지만 남들의 눈에 우리 식구는 우린 좀 특이해 보였을 수도 있을 터다.

뭐든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린 감성을 포기하고 이성을 선택한 셈이다. 우리 식구들은 포슬포슬한 감성은 없었지만 이성은 늘 꼿꼿했다.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올곧게 독립적이었고, 어떤 문제든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지금껏 그래 왔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전혀 외롭지 않았다.

불편하거나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아버지 임종 전까진 그랬다. 그런데 나는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손을 잡지도 못했다. 심지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상황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고,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허둥대기만 했다.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에야 당신을 안아드릴 수 있었다.

상 치르고 한참 뒤에야 그게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가슴이 아팠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한참 운 끝에 어머니께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더 살갑고 애틋하게 대해드리자 마음먹었다. 물론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어느 하나 실행한 게 없다. 언젠가 술기운을 빌려 한 번 시도해 봤지만 어머니가 더 정색을 하셨다.

질투는 사랑과 한 몸
 
못난 장남은 어버이 날에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건강하시라고 썼다.
▲ 어버이날 카드 못난 장남은 어버이 날에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건강하시라고 썼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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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랬다. 그건 사실이다. 그런데 하다 보니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친 비정한 아들의 변명이 참 구질구질하다. 그냥 그런 가족도 있다는 얘기 정도로 들어주시길. 어쨌든 어머니께 참 죄송했다. 어머니는 내내 표정이 굳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게장을 대접해 드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아무 대꾸 없이 차에 오르셨다. 긍정의 표현이었다. 당신께서 자주 다니시던 식당으로 향했다.

제법 유명한 식당이었는지라 주차장엔 손님과 자동차들이 가득했다. 식당 출입문은 계단 서너 개를 올라야 한다. 어린아이들도 거뜬히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지만 관절이 망가진 어머니 혼자서는 오르지 못하신다. 주차를 하고 와서 도와드릴 요량으로 어머니를 먼저 내려드리며 잠깐 기다리시라 했다. 어머니는 계단 난간을 붙들고 엉거주춤 서 계셨다.

어렵게 차를 대고 식당 쪽으로 향하는 순간 내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어머니가 웬 나이 지긋한 남자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아들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고운 손을 외간 남자가 잡고 있는 모습에 나는 격분했다. 한달음에 뛰어갔다. 도착하니 어머니는 벌써 안으로 들어가시는 중이었다. 그 남자는 예의를 차리며 문까지 열어 주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는 주차관리원이었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다그치듯 물었다.

"엄마는 왜 모르는 남자 손을 잡아요?"

어머니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셨다.

"내가 차 대고 와서 도와드리겠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나 참."

분에 못 이겨 씩씩대는 아들의 모습을 보시더니 어머니께서 한 말씀 하셨다.

"너 질투하냐?"

어라, 질투?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는, 한 사람을 광란의 지경으로까지 이끈다는, 누군가는 인간의 추악한 본능이라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것 말인가. 지금 내가 하는 짓거리가?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다. 팔순 노모의 거동을 도와드린 분에게 고마워하는 게 맞는데 나는 공연히 화를 내고 있다. 그게 질투 아니고 뭔가. 아, 그랬구나.

아, 그런데 그건 사랑과 한 몸이다. 그를 사랑해야 질투도 하는 거다. 그를 사랑하지 않고 관심도 없으면 질투는 생길 수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데면데면한 것 같았어도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거였다. 어머니와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동생과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거였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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