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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26일 농민군 토벌대(민보군) 43명을 데리고 전라도 진산군 염정동에 진입하여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처형하고서, 처형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해 9월 18일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문석봉이었다.

"때(1895년 1월 26일)는 밤 12시 정각이어서 비록 담이 큰 장사라고 해도 누군들 감히 꼼짝달싹할 수 있었으랴. 비도들 중에서 놀라서 일어난 자들은 하나하나 총이 있는 쪽으로 향하여 서게 하였으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 하여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방내의 적 16인의 목을 베는 것이 끝나자, 남은 무리들을 모두 포박하였으며 투항한 자들은 모두 400여 명이었다. 모두 옷을 벗기고 빈 방에 가두었다."(문석봉, 「토비략기 討匪略記」, <의산유고>, 158쪽.)

이렇게 문석봉은 민보군을 지휘하여 동학농민군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게 하여, 농민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베고, 농민군 둘이 들어오면 둘을 베었다. 방내의 동학농민군 16인의 목을 베는 것을 끝냈다.(低頭入來 一來一斫 二來二斫 斬了房內賊十六箇)"라고 자랑스럽게 기술하였다.

이처럼 문석봉(1851∼1896)이 민보군을 지휘하여 동학농민군 16명을 참수하였고, 400여 명을 포박하였다. 계속해서 문석봉은 부대를 이끌고 대성사로 가서 동학농민군의 수괴를 잡았고, 투항자가 400여 명이었다. 다시 문석봉의 부대는 토굴로 가서 동학농민군 40여 명을 체포하였고, 우두머리 5명을 참수하였다. 그 날이 1895년 1월 28일이었다. 이처럼 문석봉은 동학농민군 토벌대를 이끌고 가서, 대둔산에서 내려와 염정동 일대에서 최공우와 최사문이 다시 봉기한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진압·궤멸시켰다.

그렇다면 최공우와 그의 동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최공우는 진산(珍山)의 동학 접주였다. 진산의 최공우와 최사문은 2차 동학농민혁명인 항일 봉기에 참여하였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10월 23일에서 10월 25일까지, 11월 8일에서 11월 11일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과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티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미나미 고시로 사령관 휘하의 모리오 마사카즈(森尾雅一) 대위가 지휘한 제2중대가 11월 8일과 11월 9일에 걸친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대량 학살하였다.

최공우는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공주 전투에 참전하였다. 일본군과 싸운 공주 전투에서 패한 후 그는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산 대둔산 최고봉 석굴 속에 웅거하며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최공우의 동학농민군은 항일 농민군들이었다. 최공우는 대둔산의 최고지도자였다. 아래의 자료에 그 상황이 나오고 있다.

"최공우군(軍)은 공주에서 패하여 돌아와 수백명의 군을 거느리고 고산 대둔산 최고봉 석굴속에 웅거하였었는데 일일은 관병 수백명이 안개 속에 몸을 숨기여 가만히 그 산 후면으로 기여 들어오며 일제히 총질을 하였다."(오지영, <동학사>(초고본), 1924, 500쪽.)
 
대둔산 절벽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항일 동학농민군.
▲ 박홍규 화가의 ‘대둔산의 아침’. 대둔산 절벽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항일 동학농민군.
ⓒ 박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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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석봉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최공우의 항일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서울에서 민보군을 조직하여 군사를 이끌고서 대둔산 아래에 내려온 사람이었다.

문석봉은 1893년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경복궁 오위장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진잠현감에 제수되었다. 1894년 모친상으로 집에 있다가, 11월 29일에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에 임명되었다. 문석봉이 양호소모사로 임명되어 농민군 압살에 나섰는데, 문석봉이 지휘하는 양호소모사 부대에, 김문주는 참모사로, 오형덕은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9월 10일 전봉준이 삼례에서 2차 항일 봉기에 나섰는데, 이에 반해 문석봉과 김문주 그리고 오형덕은 모두 항일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1894년과 1895년 초에 문석봉과 김문주 그리고 오형덕은 항일 동학농민군 토벌대로 맹활약을 하였다.

진잠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박만종과 최정범도 공주 전투에 참여한 당사자였다. 1894년 12월 11일 진잠에 출두한 충청감사 박제순이 "박만종을 잡으라"고 지시하자, 문석봉은 "잡아 바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휘하의 기밀군관이 박만종을 체포해 왔으나, 문석봉은 박만종을 활용하여 최시형을 잡고자 하여, 박만종을 풀어주면서 최시형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12월 13일 박만종이 도주하자, 문석봉이 추적하여 직접 체포하였고, 공주감영으로 넘겼다. 공주감영에서 12월 17일 박만종을 참수하고 효수하여 걸어두었다.

1895년 1월 2일 문석봉은 서울에서 의사(義士) 26명을 불러 모아 과천에서 출발, 1월 7일 공주 부전에 도착하였다. 문석봉이 농민군 토벌대인 민보군을 결성하여 대둔산에서 저항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자 과천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1월 9일 연산을 출발하여 고산으로 향하였다. 1월 10일 고산읍 소재 대둔산 마천대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진압코자 함이었다. 조방장 김학립과 함께 병정을 이끌고 정상에 올랐다.

문석봉은 연산의 영정동에서 동학농민군이 기포한다는 기별을 듣고서 가서 그들의 소굴을 쳐서 우두머리를 총살하였다. 공주 소전 지역에서 농민군의 소굴이 많다고 하여, 조방장과 함께 병사들을 데리고 갔다. 1월 14일에 공주 소전에 도착하였다. 1월 18일 회덕 대동을 출발하였고 당일 진잠에 도착하였다.

"1월 18일 사시에 회덕 대동을 출발하여 당일 신시에 진잠에 도착하였습니다.……소위 대둔산의 적은 바로 전에 공략하려던 마천대입니다. 지리적으로 연산과 진잠 사이에 있습니다. 현재 연산에는 일본 병사들이 와서 머무르고 있어 당연히 토벌할 것이므로 반드시 갈 필요가 없습니다."(문석봉, 「순영에 올리는 글」, <의산유고>, 151쪽.)

이처럼 문석봉은 연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대둔산 마천대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당연히 토벌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군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문석봉은 1894년 11월 29일에 양호소모사로 임명된 이후에서 1895년 1월 28일 대둔산의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을 압살할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석봉은 진잠 출신으로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한 공주전투에 대장으로 참여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최정범과 박만종의 마부 심귀동을 진담의 길에서 총살하였다.(178쪽) 이어서 동학에 들어간 공주 유성에 사는 김판길을 12일 진잠 큰 길에서 총살하였다.(139쪽, 178쪽) 계속해서 동학교인 박흥근을 체포하여, 진산현의 길에서 참수하여 효시하였다.(180쪽) 아울러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인 김양순, 김관일, 심귀동, 정창일을 모두 총살하였다.(182쪽)

문석봉은 1월 19일 조방장 김학립과 함께 신영병 40명을 이끌고 대둔산 아래에 이르렀다. 다음날 20일 군사를 진산읍 20리 되는 곳에 진을 쳤다. 기밀장교 구형덕을 보내 최공우의 심복인 김공진을 잡아오게 하였다. 문석봉은 김공진에게 편지를 주어 이간책을 써서, 대둔산 마천대에 있는 동학농민군 진영을 교란시켰다. 교란책이 성공하여 1월 22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최공우가 장문화, 김치삼, 김태경 등 6인을 죽이게 하였다.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은 문석봉 부대에 의해서도, 관군에 의해서도 진압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조선군을 지휘하여 항복하지 않는 대둔산의 농민군을 강경 진압하였다. 1895년 1월 24일에 일본군 3개 분대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장위영병 30명에 의해 대둔산에서 최후로 항쟁한 동학농민군 25명은 철저히 진압·학살되었다.
동학농민군 학살사령관 미나미 고시로는 1895년 1월 21일에 이시쿠로 대위에게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미나미 고시로, 「동학당정토경력서」, 86쪽.) 1월 23일 고산현에서 이시쿠로 중대장(대위)으로부터 "대둔산에 틀어박혀 있는 적괴를 토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케우치 신타로 특무조장은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를 이끌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하였다. 다케우치 신타로는 1월 23일에는 한국군 2명과 산 위로 올라가 정찰하였다.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은 1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다케우치 신타로는 오전 3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오전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오후 1시 40분부터, 다케우치 신타로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국군 사관 윤세영·김광수를 이끌고 올라가 농민군의 본부 뒤쪽 아래까지 돌진하면서 공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케우치 신타로는 사람사다리를 만들어서 전 분대원을 등반시켰고, 일본군 1개 분대는 전부 올라와 두 번 동학농민군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하였고, 돌격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동학농민군은 당황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들과 합세하여, 항전하는 동학농민군 25명을 모두 죽였다. 전사자의 대부분은 동학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28~29세쯤의 임신한 부인까지 총살하였다.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아를 안고 천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내려 자결로 일본군에 항거하였다.

일본군은 오후 2시 동학농민군의 본부를 모두 함락시키고 그 본부의 집도 소각하였다. 침략자 일본군은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오후 3시에 대둔산을 내려왔다. 다케우치 신타로 특무조장은 "일본군은 사상자 없음. 적도(동학농민군:필자)는 전사자 25명, 노획품은 서류 약간, 화승총 50자루, 화약 약간. 탄약 소비는 1176발"이라고 일본군의 상부에 보고하였다. 일본군의 탄약 소모가 1176발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둔산 마천대에서의 동학농민군의 저항이 거셌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케우치 신타로 특무조장은 대둔산전투를 치르고 당일인 1월 24일에 상부에 보고하였다.("「대둔산부근 전투상보」, <주한일본공사관기록>6, 71∼73쪽.)
 
절벽 앞에 돌을 쌓았고,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거주함.
▲ 대둔산 속의 한덕산 산꼭대기에서 약간 아래쪽에 있었던 동학농민군 마지막 항쟁 본부. 절벽 앞에 돌을 쌓았고,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거주함.
ⓒ 김선보 전 씨알사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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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월 24일 일본군은 대둔산 마천대를 공격하여, 동학농민군을 학살하였다. 문석봉은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을 매우 다행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 24일 강화병영의 병정과 일본 병사 수백 명이 힘을 합쳐 함께 공격하여 이미 그들의 무리가 끊어지게 하였으니, 매우 다행입니다(伏幸伏幸)."(문석봉, 「순영에 올리는 글」, <의산유고>, 152쪽)
 
동학농민군 항쟁 본부 바로 밑 바위의 모습.
▲ 원광대 사학과에서 1998년 대둔산 전투 지역 답사 때 만든 철제 조립 사다리. 동학농민군 항쟁 본부 바로 밑 바위의 모습.
ⓒ 김선보 전 씨알사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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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의해 압살을 당한 날에, 문석봉은 대둔산의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인 최공우가 죽지 않고 하산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날 문석봉은 다시 최공우와 잔여 농민군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앞장섰다. 문석봉은 최공우와 잔여 동학농민군이 염정동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잡아 죽이고자 염정동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이때에 최공우, 최사문, 양양옥, 박중집, 이홍기, 김치선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충북 보은 청산에서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염정동 일대에 1천여 명을 불러 모아두고 있었다.

1월 24일 문석봉은 회덕에서 병정 20명과 장관 23명을 거느리고 진잠 남면 증촌으로 가서 진을 쳤다. 문석봉이 조직한 양호소모사 부대의 부대원 35명의 명단이 밝혀져 있다.(197∼198쪽) 1월 26일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1월 26일에 문석봉은 병사를 데리고 염정동으로 향하였다. 이수령 20리쯤에 도착하여 산 위를 습격하여 동학농민군을 잡아서 모두 결박하였다. 문석봉의 부대는 염정동에 도착하였다. 당일 동학농민군들은 김세마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문석봉이 진두지휘하여 43명의 병정들에게 김세마의 집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여 동학농민군 16명을 참수하였고, 400여 명을 포박하였다. 1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염정동 일대에 있던 최공우와 최사문이 거느린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궤멸시켰다.
동학농민군 토벌대를 이끌고 세운 문석봉의 공은 조정에 알려졌다. 곧바로 보상이 주어졌다. 고종은 문석봉에게 특별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올려주었고, 신영(新營)의 영관(領官)으로 임명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일본군과 싸웠다. 본인이 대장이 되었고, 김문주를 선봉으로, 오형덕을 중군으로 삼았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일본군과 싸웠다. 그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문석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문석봉 의병진 참여로 김문주와 오형덕은 각각 2013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894년과 1895년 초에 걸쳐 대둔산에서 최후까지 반일 항쟁하던 동학농민군을 이간질해서 죽이고, 동학농민군 토벌대(민보군)를 이끌어 대둔산 항쟁의 최고지도자인 최공우·최사문의 항일 동학농민군을 숱하게 학살한 문석봉의 행적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보훈처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다. 문석봉의 을미의병 참여 업적만을 참작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가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문석봉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침략자 일본군과 싸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까지 어떤 조치를 하였는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을미의병 참여자와 똑같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발굴하여 이분들의 명예를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하라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안내>(2019)라는 책자까지 발간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아래는 이 책자에 수록된 대둔산 전투에 참여한 분들에 대한 기술을 소개한 것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둔산전투에서 총살, 사살을 당한 순국자」

1. "강태종(미상∼1895)은 교수(敎授)로 전라도 대둔산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1895년 1월 24일 관군 및 일본군에게 사살됨"(17쪽)

2. "김재순(미상∼1895)은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대둔산에 피신하던 중 1895년 1월 24일 관군 및 일본군에게 사살됨"(65쪽)

3. "김판동(미상∼1895)은 봉도(奉道)로 전라도 대둔산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1895년 1월 24일 관군 및 일본군에게 사살됨"(76쪽)
 
 
「대둔산전투에서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자결한 순국자」

1. "김석순(미상∼1895)은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대둔산에 피신하던 중 1895년 1월 24일 관군 및 일본군이 다가오자 계곡에 뛰어들어 자결함"(47쪽)

이처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명도 서훈되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 지금까지 가시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기가 막히는 현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참고자료:
문석봉, <의산유고>;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6,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미나미 고시로, 「동학당정토경력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5,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5.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안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이병규, 「1894년 대둔산농민군의 활동과 성격」, <대동사학>6, 대동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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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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