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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영혼의 힘으로부터 생기는 미덕이다.

- 스피노자, 정치론

  
섣부른 관용은 파멸을 부른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섣부른 자선이나 용서는 하지 아니함만 못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역사에는 그러한 경우가 허다해서 중국인들은 아예 박정할 정도로 매사에 맺고 끊음이 뚜렸하다.

섣부른 관용을 베풀다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의 이야기는 '와신상담(臥薪嘗膽)' 이란 말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장작 위에서 잠을 자다(臥薪)

2500년 전 춘추시대의 일이다. 중국 강남의 땅을 무대로 오나라와 월나라가 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중국 역사에서는 '오월의 싸움'이라고 한다.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과 싸움에서 크게 패한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는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덧나 파상풍이 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합려는 죽음을 앞두고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달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는(臥薪)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을 환기시켰다.

또한 그는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마지막 말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아버지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반드시 원수를 갚겠나이다."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3년 후인 기원전 494년, 부차는 월나라 정벌에 나섰다. 부차는 큰 승리를 거두고 회계산(會稽山) 전투에서 월나라 왕 구천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부차는 조그만 자만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다.

부차는 월나라가 바친 귀중한 예물과 미녀들을 보고 마음이 흐뭇해져서 포로로 잡은 구천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던 것이다.

이때 오나라의 재상 오자서(伍子胥)가 간했다.

"폐하,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의 목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부차는 간신 백비(伯片)의 진언에 따라 구천을 용서하고 화의를 받아들였다. 잡은 호랑이를 다시 산으로 돌려보낸 셈이었다.

간신 때문에 충신을 죽이다

포로가 된 월나라 왕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의 계책에 따라 오자서의 정적인 백비에게 더 많은 뇌물과 8명의 미인을 선물로 보내어, 부차에게 자신을 처형하라고 간한 오자서를 탄핵하게 만들었다.

마침 백비는 제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오자서가 아들을 제나라에 두고 온 사실을 부차에 일러바쳤다.

"그래서 오자서가 과인이 제나라를 치자고 할 때 그렇게 반대를 하였구나. 오자서가 제나라로 달아나기 전에 죽여야 한다."

오나라 왕은 즉시 오자서에게 명검을 내려 자결할 것을 명령했다.

"간신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왕은 그것도 모르고 충신 오자서를 이렇게 죽이는구나!"

오자서는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탄한 후, 자신의 문객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내 무덤 위에 반드시 가래나무를 심어주게, 오나라 왕이 적에게 패하여 죽었을 때 그 나무로 그의 관을 만들도록 하게. 그리고 내 눈알을 도려내서 성문 위에다 걸어주게.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꼴을 꼭 보고 싶기 때문일세."

이 말을 남기고 오자서는 자신의 목을 찔렀다.

오자서가 남긴 말을 전해들은 부차는 크게 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 주머니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구천의 상담(嘗膽)

한편 구천은 오나라 왕의 하인이 되어 마구간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 구천은 책사 범려(范孼)의 제안에 따라 오나라의 왕을 연구하면서 복수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구천은 오나라 왕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시늉을 했다. 그는 2년 동안 오나라 왕을 섬겼고, 그 결과 부차는 그의 충성심을 믿고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예전에 부차가 그러했듯이 자리 옆에 쓸개를 달아 놓고 눕거나 앉을 때마다 그 쓸개를 핥으며 스스로 복수를 맹세했다. 그리하여 와신상담이란 말이 완성되었다.

"구천아,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

여기서 회계지치(會稽之恥)라는 말이 나왔다.

구천은 백성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밭을 갈고 경작을 했으며, 부인은 베를 짜고 식사 때에도 고기를 먹지 않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재기를 다졌다.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인구를 늘리고 국력을 키워오던 구천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킨다. 오나라는 제나라를 정벌하느라 국력이 쇠약해져 있는데다가, 부차가 서시에 빠져서 나라 안의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심한 가뭄마저 겹쳐서 나라의 힘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월나라 왕은 때를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서 20여 년에 걸친 지난날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구천에게 항복을 간청했지만 구천은 범려가 반대하는 것을 받아들여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부차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그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승에 가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으니 내가 죽은 후 얼굴에 보자기를 덮어다오."

한편 백비는 자신이 월나라의 신하라도 되는 듯 오나라를 점령한 구천을 반갑게 맞아들이며 축하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구천은 싸늘한 표정으로 백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오나라의 대신인데 어찌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가? 너의 왕이 양산에 있으니 그를 따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려 가차 없이 목을 베었다.
  
경국지색의 서시

오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데는 서시(西施)라는 여인의 역할도 컸던 것 같다. 서시는 경국지색(傾國之色), 효빈(效嚬), 방빈(倣嚬), 서시빈목(西施嚬目), 당돌서시(唐突西施) 같은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중국 4대 미녀 중 한 사람이다.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하는 동안 책사 범려는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헌상하여 미색에 빠지게 함으로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시는 오나라를 멸하는데 주요 역할을 한 미인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범려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에 서시를 선발하여 3년 동안 피부를 가꾸게 하고, 고상한 말을 가르치고, 우아하게 걷는 것을 가르쳐서 천하의 미녀로 둔갑 시켜 부차에게 진상했는데, 오왕 부차는 서시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경국지색(나라를 기울게 하리만큼의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부차는 진실로 서시를 사랑한 탓에 죽을 때 서시를 물에 빠트려 황천길에도 같이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오나라가 망한 후 월 왕이 서시를 강물에 던져 익사케 했다는 설도 있고, 원래 범려의 정부로 오가 망하자 범려가 데리고 은거해버렸다는 설도 있다.

이백이 쓴 '서시'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삼백 리나 되는 경호(鏡湖)의 물은 연꽃으로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연 뜯는 서시가 어찌 고운지 구경꾼은 언덕에 구름 같습니다.
달도 뜨기를 기다리지 않고 배 저어 월왕(越王)에게 돌아가다니.

 
이 시로 보면 서시가 범려를 따라 은거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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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문학과 창작 소설 당선 2017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아님슈타인의 시>, <모르는 곳으로>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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