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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과 이천서씨의 호족 서목의 만남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기전 이천에서 천이 불어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목이란 사람의 안내로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내를 건너 이로웠다는 뜻의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고사성어 앞뒤 글자를 따와 이천이라는 도시명을 내린다.
▲ 태조왕건과 이천서씨의 호족 서목의 만남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기전 이천에서 천이 불어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목이란 사람의 안내로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내를 건너 이로웠다는 뜻의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고사성어 앞뒤 글자를 따와 이천이라는 도시명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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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김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갓 지은 쌀밥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특히 물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알맞은 찰기의 고슬고슬한 밥이 된다면 특별한 반찬이 필요 없다. 점점 면과 빵을 식사 대용으로 먹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밥상의 주인공은 쌀밥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이 바로 쌀농사다. 전국 지자체 웬만한 곳, 거의 모든 시와 군에서 쌀이 생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시 안에 있는 김포공항 활주로 너머에서도 막걸리를 위한 쌀이 나온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쌀의 위상은 다른 어떤 작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쌀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쌀은 품종 또는 도정 정도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진다. 심지어 볶음밥 같은 경우 쌀알이 크고 찰기가 적은 신동진 품종을 써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 

우리는 쌀에 대해 잘 모르지만 경기도 남부 이천의 쌀이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가 있는 진상미로 이름을 날려 전국에서 가장 고급진 쌀의 대명사격이 된 이천쌀은 찰기는 물론 기름진 윤기가 흘러 일반 쌀보다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천의 명산 설봉산에서 지켜본 이천의 풍경 이천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쌀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쌀말고도 잠재력있는 관광자원이 많은 도시다.
▲ 이천의 명산 설봉산에서 지켜본 이천의 풍경 이천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쌀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쌀말고도 잠재력있는 관광자원이 많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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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 인근 도시인 광주, 여주와 더불어 도자기로 조금 유명세를 얻긴 했다. 이천 테르메덴을 비롯해 여러 온천, 테마파크 시설이 있어 근교 온천 여행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이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제부터 경기 남부의 풍요로운 고장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이천에 대해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경기도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고,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계를 맞닿고 있는 이천은 고려를 세운 왕건과 그 인연이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왕건은 신라를 합병하고,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많은 비가 내린 후 물이 불어 이천의 복하천에서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한 호족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넌다. 이후 큰 내를 건너 이로웠다는 뜻의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고사성어 앞뒤 글자를 따와 이천이라는 도시명을 내리면서 현재까지 그 이름이 전해져 온다. 그 호족은 우리가 아는 강동 6주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의 당숙 서목이다.

그렇다. 이천은 서희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 도시다. 고장마다 이름난 인물은 한두 명 있기 마련이지만 이천시의 서희에 대한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 도로 이름은 물론이요, 시내 중심가에 서 있는 동상은 물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설봉공원의 한 구역에도 그의 동상이 서있다. 게다가 서희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효양산 자락에는 서희 테마파크가 자리해있다.
     
서희테마공원의 서희역사산책로 풍경 효양산 자락의 서희테마파크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동상으로 만든 서희 역사산책로가 있다. 산책로를 거닐면서 서희의 일생을 살펴 볼 수 있다.
▲ 서희테마공원의 서희역사산책로 풍경 효양산 자락의 서희테마파크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동상으로 만든 서희 역사산책로가 있다. 산책로를 거닐면서 서희의 일생을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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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역사를 알고, 그 맥을 짚어보기 위해 이천 여행의 출발지로 서희 테마파크를 먼저 가보려고 한다. 서희 테마파크는 공원 전체에 걸쳐 조형물로 형상화된 서희의 일대기를 두루 살피는 서희역사 산책로와 서희역사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밑에서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형물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데 그 시작은 서희의 할아버지인 서신일 때부터 시작된다. 서신일은 신라 말 고려 초기 이천 지역의 호족으로 이천 서씨의 시조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신라 효공왕 당시 벼슬이 아간 대부에 이르렀으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여기 이천의 효양산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에게 남다른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여든이 넘도록 자식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신일은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아기 사슴을 풀 더미 속에 숨겨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구해준 사슴은 나의 아들이라 말하고는 곧 나라에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며 자자손손 크게 번성할 거라 전해준 후 홀연히 사라졌다.

과연 산신령의 말대로 열 달 후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가 서희의 아버지인 정민 공 서필이다. 천수를 다한 서신일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슴이 상주의 옷을 물고 효양산의 정상부로 묫자리를 안내했다. 지금도 이천 서씨 시조묘가 산의 뒤편에 남아있고, 아직도 그 위세는 당당하다.     

이천 서씨는 왕건에게 도움을 준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해서 서희의 아버지인 서필 때부터 재상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서필이 벼슬자리에 오른 시기는 고려 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권력을 휘두른 4대 왕 광종 시기였는데 하루가 다르게 왕자와 귀족들은 숙청되기를 일삼으니 아무도 그에게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서필만이 그에게 직언을 올릴 수 있었다. 광종은 말 관리를 못했다는 이유로 담당자를 처형하려 했지만 서필의 반대로 목숨을 살린 일도 있었고, 호족을 길들이기 위해 귀화인의 집을 마련한단 핑계로 강제로 집을 뺏었는데 서필은 집을 바치겠다 이야기하고는 "귀화인들이 오니 재상의 집은 모조리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 집은 누추하나 가져가시고 저는 은퇴할 때 봉급을 모아 작은 집을 사서 늙겠습니다"라고 하니 광종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일을 거두었다고 한다.    
 
서희테마파크의 서희역사관 전경 서희역사관에서는 서희의 일대기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국제정세 현재 외교관이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살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 서희테마파크의 서희역사관 전경 서희역사관에서는 서희의 일대기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국제정세 현재 외교관이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살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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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직한 신하였으니 그의 아들 서희도 훌륭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단순히 거란(요)과의 외교담판으로 알려져 있지만 982년 북송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 병부상서'라는 정 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고려 초기 북방 정세는 꽤 복잡했다. 북방에서 거란이 나라를 건국한 후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력은 더욱 커지면서 결국 중원의 송나라와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맺고 기세등등한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후방의 고려가 언제든 송과 연합을 맺고 칠 수 있다는 우려감이 점점 커져 결국 거란은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첫 공격을 결행하게 되었다.      
 
서희의 신의 한수 강동 6주 담판 서희는 거란의 속셈을 단박에 깨우치고는 거란 장수 소송녕과의 담판을 통해 싸움 한번 하지 않고 강동 6주를 얻는데 성공한다.
▲ 서희의 신의 한수 강동 6주 담판 서희는 거란의 속셈을 단박에 깨우치고는 거란 장수 소송녕과의 담판을 통해 싸움 한번 하지 않고 강동 6주를 얻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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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거란(요)의 침입 속에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서희는 침입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의 의도를 읽고는 직접 담판을 지으러 간다. 마치 현대 외교전을 방불케 하는 만큼 양측의 기싸움은 대단했다.

서희는 "요나라와 교류를 못한 건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러하오.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한테 준다면야 어찌하여 요나라와 교류를 아니하겠소?"라는 말 한마디로 오히려 압록강변의 강동 6주를 손에 넣는 쾌거를 이뤘다. 서희 역사관을 둘러보면 이러한 과정들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리가 가진 패를 끝까지 숨기면서 상대방이 가진 패를 아는 것이 요즘 외교의 핵심이다. 명분은 물론 실익까지 취하는 서희 같은 사람이 요즘 절실한 때다. 각설하고 서희는 1차 여요 전쟁이 끝난 후 오래지 않아 죽었지만 아들 서눌도 재상을 지내면서 3대에 걸쳐 높은 벼슬자리를 하게 되었다.     

이제 이천을 대표하는 인물인 서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이천 서씨가 이천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서희 테마파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이천을 알아가 보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덧붙이는 글 | 9월 17일부터 전국 온라인 서점에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이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탁피디의 여행수다에서도 팟케스트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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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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