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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군 영해면 보도연맹원들이 6.25 전부터 구금되어 있던 어업조합 창고
 경북 영덕군 영해면 보도연맹원들이 6.25 전부터 구금되어 있던 어업조합 창고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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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읔." "가만 있어!" "..."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어업창고 앞은 어수선했다. 경찰들은 GMC 트럭 적재함에 보도연맹원들을 태웠다. 이어 주저앉은 보도연맹원들 머리 위로 천막을 씌웠다. 한여름 날씨에 비오듯 땀이 쏟아지는데 천막까지 씌우니 사람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어 경찰 4명이 적재함 네 귀퉁이에 올라앉았다. 보도연맹원 머리 위에 올라탄 격이었다. 그러니 경찰 아래에 있는 이들은 아우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골로 갈 줄 알아!" 경찰들이 윽박질렀다.

그런데 경찰이 깔고 앉은 사이로 천막이 들쳐지면서 한 사내가 소리쳤다. "지는 권원호라캅니다." 당황한 경찰이 제지하기도 전에 사내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할매요. 할매요. 잘 계시이소"하며 권원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할머니 집으로 흰 뭉치를 던졌다.

"이 새끼가 죽으려구 환장했나!" 욕설과 함께 개머리판이 사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천막 아래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웅성거리긴 했지만 소동은 금세 진정됐다. 다행히 할머니 집 마당에 떨어진 뭉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세상에 눈물로 쓴 마지막 편지 

이어 한 시간을 달린 트럭은 강원도 울진군(현재 경북 울진군) 기성면 어티재에 도착했다. 80리(32km) 길이었다. 현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2개가 파여 있었다. 트럭에서 내린 사내들은 그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앞에 총." 사수들은 사내들 앞에 섰다. "발사!" '탕탕탕' 사내들은 짚단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총살은 이어졌다. 울진군 기성면 어티재에서 영덕군 영해면·창수면 보도연맹원 140명(비공식 집계)이 국군 제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들에게 학살된 것은 1950년 7월 8일의 일이었다,

"모두 집에 갔다 와라." 어업창고 문을 연 영해 대진지서장이 말했다. 보도연맹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질 즈음, 찬물을 끼얹는 지서장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가족을 대신 잡아 올 거야!" 누구의 명령이라고 이의를 달겠는가. 그렇게 보도연맹원들이 어업창고 문을 나선 날은 단오날인 1950년 6월 20일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5일 전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괴시2리 집으로 돌아온 권원호(1931년생)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루 특별휴가(?)를 받았지만, 창고로 돌아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구야. 우리 장남, 얼굴이 많이 상했구마이. 찬은 없지만 밥 좀 묵거래이." "아이라요. 지금은 밥 생각이 없슴니더." 권원호는 자기 방에 들어와 필기도구를 꺼냈다.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상황에 뭔가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려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앞이 뿌여지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연필을 다시 들었다. 유언장이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첫머리는 '관어대여 조국이여'로 시작했다. 관어대는 그가 살던 마을 뒷산 상대산 정상에 있는 정자였다.

아아 분하다 분하다 / 아우성치는 금수강산아! /
어미·아비 잃은 어린 청노루 목 놓아 울고 / 조국이 울부짖고 /
하늘마저 울고 // (중략)
아부지요! 어매요! / 억울 애먼을 짊어지고 /
우리들도 어딘가 죽을 곳에 끌려가겠지만 /
통곡하지 말아요 / 슬퍼하지도 말아요 /


여기까지 쓴 권원호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종이에 쓴 글씨가 눈물에 번졌다. 심호흡을 한 그는 마지막 문장을 써내려갔다.

관어대여! 조국이여! / 부디 부디 잘 계시오 / (중략)
그날이 오면은 그날이 오면은 / 반짝 반짝 웃으며 엿듣고 있을게요 /
자유소리! / 평화소리 / 희망소리!


세상을 향해 쓴 마지막 편지 치고는 너무 차분한 글이다. 그렇게 권원호는 마지막 편지를 쓰고 단오날 저녁 어업창고로 도로 갔다. 역시나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 이들은 그곳에 14일간 구금되었다가 7월 8일 울진으로 향하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캄캄한 천막 아래 숨죽이던 권원호는 자기 마을을 지날 즈음 천막을 확 제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자신이 죽으러 간다고 세상에 알린 것이다. 놀랍게도 그 눈앞에는 집안 할머니가 서있었고 권원호는 할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해방되니 죽게된 독립운동가들

"쿠당탕." 몽둥이를 든 대한청년단(한청) 단원들은 집 안의 가재도구를 발로 차고는 마당으로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몽둥이세례가 쏟아졌다. 한청의 횡포는 유명해서 누구도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잠시 후 마당에 쌓여 있는 이불과 가재도구에 성냥불이 던져졌다. 대부분 옷이며 나무로 된 가구, 책 등이어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마당에서 불구경을 하던 한청 단장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집주인 권병희가 달아나고 없었기 때문이다. 1949년 7월 16일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신간회 영해지회 간부를 시작으로 영해청년동맹, 비밀결사 공작위원회 활동을 한 권병희(1904년 생)는 1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하지만 1949년 7월엔 해방 후 인민위원회 등 좌익 활동을 한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고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하지만 권병희는 이후 경찰에 붙잡혔고 1949년 9월 15일 경북 영덕군 축산면 기암리 부근에서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10여 년간 몸 바친 애국자에게 돌아간 것은 '학살'이었다. 가족들은 권병희가 죽은 지 3일 만인 1949년 9월 18일에 시신을 수습했다.

권병희가 죽던 해에 괴시2리 사람들은 네 구의 시신을 더 수습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을 갔다온 권수봉(1924년생)은 해방 직후 마을에 야학관을 개설하고 주민에게 무료로 글과 노래를 가르쳤다. 그 역시 1949년 7월 19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군·경에게 죽임을 당했다.

해방 직후 영덕군 영해면은 독립운동가 권병희를 중심으로 좌익 활동이 활발했다. 이후 군·경의 좌익 탄압으로 이들은 도피 길에 들어섰고 일부는 빨치산 활동을 했다. 그런데 군·경은 이들에게 합법적 처벌이 아닌 야만적인 테러와 학살을 자행했다.

1950년 단오날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쓴 권원호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5학년 때 좌익들의 쪽지 심부름을 해 고초를 겪었다. 동생 권인호(1940년생, 영덕군 영해면 괴시2리)의 증언이다.

"형님이 쪽지 심부름을 한 지 1년 만인 1949년도에 그 사실이 탄로 났어요. 영덕경찰서에 잡혀간 형님이 한 달간 유치장 신세를 졌는데요. 숱한 전기고문을 당해 석방되었을 때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어요."
 
민간인학살 피해자 권원호의 동생 권인호
 민간인학살 피해자 권원호의 동생 권인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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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무덤에 144구의 시신이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들은 권원호의 부모 권을갑과 남응남은 둘째 아들 권재호와 함께 울진군 어티재로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어티재에는 권을갑 가족처럼 자식과 남편의 학살 소식을 들은 영덕군 창수면·영해면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큰 무덤 앞에서 곡을 하는 여성들도 보였다.

무덤은 오른쪽 왼쪽 두 군데였다. 사람들은 먼저 왼쪽 무덤을 허물기 시작했다. 남응남은 두 개의 무덤 중 오른쪽 무덤에 아들 권원호가 누워 있을 것만 같았다. "악!" "엉엉." 놀람과 슬픔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군가의 자식들이 입을 벌린 채 피투성이가 돼 엉켜 있었다. 벌린 입에는 흙이 들어 있었다. 자식과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가슴을 치며 곡을 했다. 왼쪽 무덤을 완전히 파헤치니 72구의 시신이 나왔다.

하지만 남응남이 찾던 권원호의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응남은 한편으로는 맥이 빠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무덤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원호 아버지요. 저기 원호가 있습니더." 응남의 말에 권을갑은 꼼짝도 앉은 채 눈물만 쏟았다. 권재호는 "형님"하면서 주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기하게도 오른쪽 무덤에서도 72구의 시신이 나왔다. 두 개의 무덤에서 총 144구의 시신이 나온 것이다. 이는 권을갑·남응남 부부가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바다. 하지만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에 경북 영덕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진실규명 하면서 어티재에서 희생된 사람이 약 80명이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아들 권원호를 비롯한 괴시2리 보도연맹원 희생자 권수일, 권성달 등 8구의 시신을 소달구지에 싣고 고향으로 향했다.

전쟁 전에 이미 예비검속 시작

영덕군 영해면 보도연맹사건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도 밝힌 바와 같이, 영덕군 영해 대진지서는 1950년 6월 중순에 이미 관내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대진리 어업창고에 구금했다. 그러다가 4~5일 만인 단오날(6월 20일) 잠시 석방시켜 주었다가 재구금했다.

즉, 6.25가 터지기 전에 이미 보도연맹원을 붙잡아 들인 것이다. 이는 "서울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협조해 우익인사들을 학살했기에,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기존의 논리를 뒤집는다.

한국전쟁 당시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였던 김만식(1927년생)은 2007년 7월 4일 충북도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950년 6월 28일경 강원도 횡성에서 춘천지역 보도연맹원을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춘천의 마을 단위에서는 늦어도 6월 26일부터 보도연맹원 소집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덕군 영해면 사건은 이보다 40일이나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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