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는 실패한 것 같아."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아버지에게 JTBC <인간 실격>의 여주인공 부정(전도연 분)이 말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걱정한다.

"회사에서 뭔 일 있냐?"

어쩌나, 그녀는 아버지가 말하는 그 회사라는 출판사에서도 잘렸다. 현재 한 젊은 여배우의 집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중이다 부정은 답한다.

"그런 일이 아냐, 그냥 내가 못나서."

"너는 내 자랑인데"라고 아버지가 말하지만 부정은 한결같다. 

그렇다. <인간 실격>의 여주인공 부정의 인생은 그녀의 말처럼 꼬여 버렸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대필 작가가 되었고, 그나마 그 일조차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로 인해 출판사에서도 짤렸고, 유산으로 아이도 잃었다. 가사 도우미 신세다. 연하의 남편과는 교감이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시어머니와는 앙숙이다. 

모처럼 드라마로 돌아온 허진호 감독의 작품답게 감각적인 영상이 돋보인다. 하지만 부정은 도무지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내보이지 못한다. 겨우 그녀가 잡은 건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은 강재의 팔이다.   

세상과 불협화음을 빚는 부정 
 
 인간 실격

인간 실격 ⓒ jtbc

 
드라마 <인간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처럼 주인공의 자의식 강한 독백으로 드라마의 서막을 연다. 소설 <인간 실격>은 인간 사회에 태어나 그 속에 동화되어 살아보려 애썼지만 끝내 실패를 승인하고 만 주인공의 자전적인 사소설이다. 결국 네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다섯 번만에 '성공(?) 하고만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결국 주인공이 인간 세상에 아듀를 고하며 마무리된다. 

그런 소설의 모티브를 그대로 따온 듯 드라마 속 여주인공 부정은 세상과 불협화음을 낸다. 시어머니와 한바탕 싸움을 하게 된 계기는 경찰서에서 온 출두요구서 때문이다. 이유는 악플. 여전히 아내가 출판사에 다니는 줄 아는 남편은 그런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부정의 아버지처럼 남편도 아내가 가사 도우미를 하는 줄 모른다. 그렇듯 부정은 드라마 초반 등장하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세계 속에 웅크려 실패를 선언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버지를 옆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부정을 보는데 또 한 명의 '부정'이 떠오른다. 그녀처럼 모든 것을 잃고 가사 도우미를 하던 한 여성이. 바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찬실이(강말금 분)다.   

가진 것 없어도 복도 많다는 찬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찬란

 
'아, 망했다.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라는 영화의 헤드 카피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던 찬실이는 감독이 하루 아침에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직업을 잃는다. 직업을 잃었으니 당연히 돈이 없다. 돈이 없는 그녀는 결국 산꼭대기 할머니네 집 문간방으로 쫓기다시피 이사를 가게 된다. 이사는 했지만 호구지책이 급선무다. 결국 그녀는 아는 후배 여배우네 집 도우미를 자처한다. 

집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고 도우미 신세라는 점에서 부정과 겨룰 만하다. 그래도 부정은 팔이라도 잡아 끌 강재(류준열 분)이라도 등장하지만, 찬실이 앞에는 한겨울 흰 러닝, 팬티 바람의 자칭 '장국영'이라는 귀신이 어른거린다. 

찬실이와 부정, 누가 더 불행할까? 키재기라도 하자는 게 아니다. 상황으로 보자면 두 여성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은데, 두 여성의 태도가 천지차이라 비교가 된다. 

돈도 안 되지 않냐는 부정에게, 그래도 폐지라도 주울 수 있는 게 어디냐는 아버지. 부정은 그런 아버지에게 실패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이는 스스로 자처해서 후배 여배우네 도우미가 된다. 프로듀서였던 사람이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던 여배우네 집의 도우미라니. 하지만 찬실이는 참 열심히 일을 한다. 밥도 해놓고, 집도 깨끗이 치우고. 그녀가 성실하게 돈도 안 되는 영화를 해왔듯이, 그렇게 도우미 일도 한다. 그 피폐함 속에서도 찬실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낸다. 도우미 일도 하고, 주인집 할머니 글도 가르쳐 드리고, 함께 밥도 먹는다.

영화 속 찬실이는 어설픈 연애조차도 실패해도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자신이 산꼭대기 단칸 방으로 쫓겨나도, 후배네 집 술병이나 치우고 있어도 단 한번도 그녀의 입에서 자기 삶의 실패를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런데 부정을 보다보면 어쩐지, 그녀가 불쌍해 지는 대신,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을 헤아리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폐지라도 주울 수 있는 게 어디냐는 아버지 말에 담긴 삶의 엄정함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자기 연민의 늪에 빠진 여주인공을 드라마 <인간 실격>은 구원할 수 있을까. 날마다 혹독하게 삶과 싸워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부정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5252-jh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인간 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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